
지난 4월말 기준 미국 나스닥 상장 사이버 보안 기업 팔로알토는 시가총액이 560억달러(약 75조원)에 이른다. 팔로알토 외에도 크라우드스트라이크(약 38조원). 체크포인트(약 22조원), 지스케일러(약 18조원), 옥타(약 15조원) 등 원화 환산 시총이 조(兆) 단위를 넘어서는 종목들이 수두룩하다.
물리적 보안을 겸하는 SK쉴더스가 지난해 상반기 조 단위 시총을 기록하는 보안 종목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금리상승기 불리한 시장 여건에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으며 상장 자체가 무산됐고 결국 해외 투자자에게 지분이 매각됐다.
그나마 국내 상장사나 대기업 계열사 등은 사정이 낫다. 국내 정보보안 기업 669개사의 93%가 자본금 50억원 미만의 중소기업이다. 669개 전체 매출은 2021년 한 해 4조5497억원, 같은 해 글로벌 사이버 보안 시장(약 177조원)의 2.6% 수준이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러시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해커들과 연일 일전을 벌이며 기술력을 가다듬어온 한국보안업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관련 윤석열 정부들어 '국가 사이버 안전망 구축'을 공약하며 경직된 보안관련 규제 완화와 인력양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분위기가 다소 반전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금줄은 여전히 말라붙었다는 목소리가 크다. 오랜 보안업 디스카운트로 인해 기술 사업화나 원천기술 확보, M&A(인수합병)을 통한 규모의 경제 구축이 어렵다는 얘기다.
이동범 KISIA(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은 "국내 정보보호 산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소 정보보호 기업에 '정부주도의 적극적 자금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의 의지가 외부에 나타나면 민간 투자기관들도 따라서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돈 없어서 기술개발 못해요"… AI로 기술 고도화? 국내 보안업 70% 자금난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부처들이 운용하는 정책펀드는 23개에 이르고 이들을 통한 운용 자금의 규모는 1조6200억원에 이른다. 이들 자금은 '모태펀드'라는 이름 하에 각 소관부처별 육성대상 산업의 지원에 활용된다.
그러나 여기에 '사이버 보안' 또는 '정보보호'이라는 이름을 단 펀드는 단 1건도 없다. 그러다보니 사이버 보안 산업을 대상으로 한 민간 투자금의 유입도 미미하다. 지난해 5월 과기정통부, 벤처기업협회가 발표한 '2022년 ICT(정보통신기술) 분야 벤처캐피탈 투자 동향' 자료에 따르면 ICT 업종 전체 투자자금(3조1438억원) 중 패키지·게임 소프트웨어에 투자된 자금이 2조152억원에 달했고 정보통신·방송(7005억원) 전자부품(3177억원) 등 분야에도 주로 자금이 투자됐다.

정책자금에서의 소외와 민간 투자의 외면으로 사이버 보안 산업의 영세성은 심화돼 왔다. 국내 정보보안 669개 기업 중 2005년 이전, 즉 설립 이후 현재까지 업력이 18년 이상이 되는 기업의 비중은 50.8%에 이른다. 그런데 이중 자본금 10억원 미만 기업 비중은 73.5%에 이르고 50억원 미만 중소기업까지 더한 비중은 93.2%에 달한다. 정보보안 기업의 90% 가량이 비상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정보보안 산업은 비상장 영세 중소기업 위주로 구성된 업종인 셈이다.
이들 669개사의 2021년 한 해 매출은 4조5497억원, 같은 해 글로벌 정보보안 시장 전체 규모(약 177조원)의 2.6% 수준에 그친다. 미국(40.9%) 중국(7.5%) 영국(6.5%) 일본(5.4%) 독일(5%) 등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수준이다. 1개사당 평균 매출은 불과 68억원, 같은 해 코스피 상장사 595개사의 연결매출 평균치(3조2249억원)는 물론이고 코스닥 상장사 1048개사의 매출 평균치(1762억원)에 크게 못 미친다.
실제 올들어 생성형 AI 등 출현에 따른 기술 고도화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국내 정보보안 기업 10곳 중 7곳 가량이 자금조달 어려움으로 인해 기술개발을 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 중 '인력확보 및 유지' 항목도 결국은 자금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문제다. 사실상 '자금조달 어려움' 때문에 기술을 개발하기 어렵다고 답한 기업의 비중이 69.5%에 이른다는 얘기다.
이에 업계에서는 사이버 보안 전용 정책펀드의 조성을 호소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영세한 규모로는 AI 등 딥테크를 활용한 보안 기술 선도화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책펀드의 투자가 이뤄진다는 것은 정부가 해당 산업을 육성·지원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것인 만큼 민간에만 의존했을 때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