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넓은 언니의 최고봉, 라미란이 보여주는 ‘나쁜엄마’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4.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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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


‘안 할 이유가 없는, 아니, 매달려서라도 꼭 해야만 했던 작품’. JTBC 수목 드라마 ‘나쁜엄마’(연출 심나연, 극본 배세영) 제작발표회에서 라미란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나쁜엄마’에 대한 우려가 한 움큼 덜어졌다. ‘뻔한 이야기 아닐까 생각했는데 대본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는, 어찌 보면 흔한 홍보성 멘트 같은 말인데도, 그 말을 한 대상이 라미란이기에 믿음이 갔다.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영순(라미란)과 뜻밖의 사고로 아이가 되어버린 아들 강호(이도현)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가는 감동의 힐링 코미디. ‘나쁜엄마’의 한 줄 설명이다. 여성 서사물이 많아지면서 엄마, 아내가 아닌 한 인간으로의 여성을 그려내는 경향이 짙어지는 와중, 대놓고 엄마를 표방하는 이야기가 다소 뻔하고 올드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라미란도 그런 마음이 들었고, 대중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쁜엄마’ 1화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낳아 모질디 모질게 키우는 영순의 모습은 놀랍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 ‘응답하라 1988’의 ‘치타여사’나 ‘부암동 복수자들’의 ‘홍도생선’ 같은 넉넉하고 따스한 라미란의 모습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쁜엄마’의 영순은 라미란이 그간 선보여왔던 넉넉하고 푸근한, 유쾌한 라미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프러포즈 반지를 낀 돼지를 보며 수줍은 함박웃음을 짓고, 한날 한시에 몸을 푼 이웃사촌 정씨(강말금)와 친근한 눈웃음을 주고받고, 한 떨기 개나리와 샛노란 단무지 사이를 오가는 쨍한 정장을 입곤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는 우리의 친근한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들. 반면 어린 아들이 식곤증으로 공부를 못할까 배불리 먹지도 못하게 하고, 평생 소풍이니 수학여행이니 가지 못하게 만들고, 사고를 당한 여자친구를 돌보느라 수능시험을 치르지 않은 아들에게 “죽기라도 했어?”라는 독기 어린 말과 함께 뺨을 매섭게 올려붙이는 모습도 공존하는 엄마다. 그러니 라미란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는 소회를 남겼겠지. ‘나쁜엄마’를 본 우리도 비슷한 심정이다.

'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


생각해보면 라미란은 언제나 단선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간이 아무리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존재라지만, 대중문화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주인공을 제외하면 주변부 인물들은 대체로 단선적인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종종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라미란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굉장히 친근하고 편안하면서도 뻔하지 않았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밉상 같으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움과 공감을 일으키는 ‘낙원사의 지박령’ 라미란도 그랬고, 속 넓고 인심 좋은 언니지만 종종 가난했던 과거를 보상받고 싶은 티를 잔뜩 내고 눈치코치 없는 말로 이웃의 마음을 쥐어박곤 하던 ‘응답하라 1988’의 ‘치타여사’ 미란도 그랬다. 주연으로 영역을 넓히고 나선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도 더욱 다채로워졌다. 여성 투톱 버디물로 화제를 모았던 ‘걸캅스’를 시작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정직한 후보’에선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워 밥 먹듯 거짓말을 하는 4선 국회의원으로 프로 정치꾼의 면모를 보이고, ‘고속도로 가족’에선 자식을 잃은 아픔을 지니고도 다른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애잔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나쁜 엄마', 사진제공-JTBC

한때 칭찬의 의미로 그에게 붙여졌던 ‘여자 류승룡’ ‘여자 송강호’란 수식어는 이제 시대에 맞지 않지만, 적어도 왜 라미란에게 차인표가 ‘여자 송강호’라는 찬사를 바쳤는지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예컨대 같은 ‘아줌마’라도 다들 다른 ‘아줌마’라는 거죠. 그들은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요”라고 말한 것처럼, 라미란은 누구를 연기하든 ‘라미란화’하면서도,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과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감과 설득을 사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웃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돌리면서도 남의 인생 때문에 왜 네 인생을 망쳤느냐는 독한 소리를 자식에게 퍼붓는 모습에 괴리를 1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전적으로 라미란의 공이다.

최근 들어 여성 서사물이 많아지면서 이정은, 염혜란, 김선영, 장혜진 등 연기 잘하고 품 넓은 언니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중 라미란은 한국영화계는 물론 안방극장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동료 배우들은 물론 대중이 첫손으로 꼽는 존재감 있는 언니의 선봉장 격이다. 2화까지 방영된 ‘나쁜엄마’를 보고 나니, 이 언니가 보여줄 영역이 얼마나 많은지 기대를 돋우게 된다. 망나니 칼춤 추던 이도현과 함께 얼마나 시원하게 시청자의 뒤통수를 갈겨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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