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불만을 감동으로 바꿀 수 있다면

머니투데이 김진형 산업2부장 2023.04.10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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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2일, 농림축산식품부가 12개 식품업계 임원들을 불러 "가격 안정에 최대한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설을 앞두고 있었기에 식품업계는 이 메시지를 설까지는 가격을 올리지 말라는 지침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설이 지나자 마자 식품업계는 일제히 가격 인상에 나섰다. 버거, 빵값, 생수, 음료, 과자 등등 식품가격 인상 소식이 쏟아졌다. 가격인상이 이어지면서 '소주값 6000원' 논란이 벌어졌다.



2월28일, 농식품부는 다시 12개 식품회사를 호출했다. 1월 소집 때와는 격이 달랐다. 1월엔 농식품부 담당 과장이 회의를 주재했지만 이번엔 장관이 직접 나섰다. 식품회사들도 대표들이 불려 나왔다. 정황근 장관은 "최근 식품물가를 엄중한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관 입에서 '엄중'이란 단어가 나왔다는건 심각한 경고다.

이번엔 가격 인상 계획 철회 소식이 이어졌다. CJ제일제당이 장류의 편의점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했고 풀무원, 대상 등도 인상 계획을 접었다. 이어 논란의 소주 출고가격이 동결됐다. 맥주업계는 미리 써놨던 맥주 출고가격 인상 보도자료를 '당분간 동결'로 급하게 수정했다.



정부의 압박으로 원재료, 인건비 상승을 떠안아야 하는 기업의 어려움을 얘기하려는게 아니다. 가격 통제는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는 얘기도 아니다. 가격 인상은 당분간(정 장관은 상반기까지 자제하라고 했다) 물건너갔다는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온 나라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에 고통받고 있는데 '정부 때문에 원가도 가격에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토로해 봐야 돌아오는건 소비자의 비난 뿐이다.

# 가구회사 시몬스는 지난해 매출이 6.4%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36% 급감했다. 매출은 소비심리가 꺾인 탓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줄어든건 원가가 상승했지만 판매가격을 동결한 영향이 컸다. 그 전에 이미 가격을 올렸다는 잡음도 있었지만 시몬스는 "올해도 가격을 동결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임원진 연봉을 20% 삭감했다.

크라운제과는 2019년 이후 제품 가격을 계속 동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원료 가격이 올라 대부분 제과업체들이 가격을 올렸지만 크라운제과는 대체 원료를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3년전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착한 가격과 선행으로 유명한 오뚜기는 지난해 10월 진라면 등 라면류 가격을 평균 11.0% 인상했다. 하지만 가격을 올린 다른 라면업체들에 비해 소비자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올린 가격도 다른 라면값보다는 쌌고 소비자들이 오뚜기가 그동안 '착한 가격'을 유지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뚜기 라면값 인상 기사에는 "오뚜기가 올릴 정도면 시장경제가 심각해진거다", "오뚜기는 올려도 인정한다" 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동결했던 식품업계와 유통업계들이 최근 낮은 가격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오뚜기는 쫄면 성수기인 여름을 앞두고 '진짜쫄면' 편의점 가격을 10.5% 내렸고 편의점 CU는 매장의 즉석 원두커피 가격을 낮췄다. 이마트24는 자체브랜드(PB) 생수 가격의 연중 동결을 선언했고 GS25도 PB 생수 가격 인상을 철회했다. 최근 편의점에서 가장 핫한 편도(편의점 도시락)는 착한 가격에 할인까지 더해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팔린다. 온라인에 밀려 갈수록 손님을 잃고 있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 유통회사들은 대규모 할인행사로 소비자들을 매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100배, 1000배 큰 용기로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부 때문에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는 불만을 역으로 활용하면 고객 감동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가격을 올릴 수 없다면 매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파는 수밖에 없다.

김진형 산업2부장 /사진=인트라넷김진형 산업2부장 /사진=인트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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