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싸우고 기계가 돈번다[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2023.04.06 05:00
글자크기
선친은 벼농사를 지었다. 고령에 투병 중이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아버지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벼를 말리고 자루에 담아 창고에 쌓는 것까지 남의 손과 기계를 빌렸다. 대신 한 해 농사 끝에 벼를 팔아 번 돈은 비룟값과 농약값, 기계삯을 겨우 맞출 정도였다. 아버지가 손에 쥔 것은 자경농에게 정부가 주는 직불금이 전부였다. 투입하는 노동도, 자본도 거의 없이 직불금만큼 지대를 받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국 사회 전체의 고령화가 문제지만, 농촌은 특히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경영주가 60세 이상인 농가 비율은 77.3%다. 벼는 이런 초고령화에 최적화된 작물이다. 한국농촌사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논벼 기계화율은 98%다. 반면 밭작물 기계화율은 콩 67%, 고추 47%, 마늘 59%, 양파 63% 등 평균 60% 수준이다. '쌀 미(米)' 자가 벼농사는 농부의 손길이 88(八十八)번 간다고 뜻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현대에는 힘없는 노인들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손이 안 가는 게 벼농사다. 대신 돈도 기계가 번다.



정치권 갈등의 한복판에 자리한 양곡관리법은 사실 이런 농촌의 사정이 배경에 있다. 2021년 기준 작물 재배 농가 86만6840가구 가운데 논벼수확농가는 53만1999가구로 61.4%다. 고령화한 농가가 다른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오로지 벼농사에만 매달린 결과다. 농촌 유권자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일부 정치권이 법을 밀어붙였다. 양곡관리법 갈등은 식량안보라는 거창한 말을 갖다 붙였지만 본질은 고령화 문제다. 고령화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과 국토 이용 비효율이 예견되는 양곡관리법이 해법은 아니다.

양곡관리법만큼 뜨거운 간호법 논란 또한 인구구조 변화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협력관계로만 여겨지던 의사와 간호사의 직역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간호사 위상 변화가 배경이다. 노인 환자는 아무래도 의료기관에서 이뤄지는 적극적인 치료보다는 건강관리와 돌봄이 더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역사회 중심의 건강관리와 돌봄을 강조한 간호법을 들고나왔다. 위상이 높아진 간호사들의 독립선언이다. 기존 의료법 체계를 뒤흔드는 사안인 만큼 숙고해야 했지만 정치는 이런 직역간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조장했다.



이런 갈등이 맛보기에 불과하다. 유례없는 고령화 속도는 산업구조와 교육, 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필연적인 고령화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이 정치권과 정책 담당자들에게는 앞으로 더 요구될 것이다.

모든 문제를 당리당략이 아닌 인구학적 관점에서,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높일 것이냐를 중심에 두고 풀어야 한다. 근로시간 개편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접근할 때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나온 '일본 노동개혁의 최근 동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다시 주목해야 한다.

보고서는 비슷한 시점에 단행한 한국과 일본의 노동개혁을 비교했다. 당시 한국은 노동시간 상한을 주52시간으로 규제했다. 반면 일본은 초과노동시간을 주간 규제 없이 월간 45시간으로 규제해 휴일노동을 포함하면 1주에 약 60시간 근무할 수 있게 했다. 보고서는 일본이 한국에 비해 집중적인 노동이 필요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노동개혁 목표 자체가 문재인 정부는 소득증가와 일자리창출인 반면 일본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는 게 보고서의 내용이다.


노동계와 일부 정치권은 이번 정부의 노동개혁으로 주 69시간 노동이 가능해지면 노동자가 과로사로 내몰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비슷한 정책을 시행하는 일본에서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접하지 못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의 심각성을 경험한 나라다. 최소한 그렇게 비난하기 좋아하는 일본만큼이라도 고령화 대응에 진정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인간이 싸우고 기계가 돈번다[광화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