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나마 충분한 돈이 있을 경우 신약 개발 도전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다. 그래서 국내 바이오 벤처들은 그동안 필수적으로 IPO(기업공개)를 통한 자금조달에 나섰다. 수백억원 이상의 자금을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모을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기술이전을 제외하면 지난 18년간 기술특례로 상장한 바이오 중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을 만한 신약 개발 성과를 낸 곳은 보이지 않는다. '상장 5년 내 이익을 내겠다'는 약속을 지킨 바이오 회사는 손에 꼽힌다. 대부분 아직 적자 신세다. 그나마 흑자를 낸 에이비엘바이오도 약속했던 기간(상장 4년 내)을 넘어 이익을 냈다. 신라젠, 코오롱티슈진 등 일부 회사는 한동안 거래정지 상태였다. 최근엔 성장성 특례 1호로 상장한 셀리버리가 영업손실 급증으로 감사의견 거절 통보를 받고 상장폐지 위기에 몰렸다.
악재가 쌓이면서 K바이오에 대한 시장 신뢰는 서서히 무너졌다.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등까지 겹치면서 국내 바이오 업계에 돈이 몰리지 않기 시작했다. 예년 분위기를 되찾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문제는 바이오 산업 특성상 투자유치가 곧 생존과 직결된다는 데 있다. 연구와 운영 자금은 생존의 열쇠나 마찬가지다. 기술이전이 원하는 때 이뤄져 돈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바이오 기업의 도전은 투자자들의 선택이 있어야 가능하단 의미다.
바이오에 대한 시장과 투자자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신뢰를 무너뜨린 지난날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먼저 IPO 전후 마음가짐이다. 한 바이오 컨설팅 기업 대표는 "일부 회사는 '일단 돈을 땡기자'는 생각으로 IPO란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상태만 만들고, 시험을 잘 치른 후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며 "반성하고 고쳐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업계가 '실적'에 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 상장 바이오의 대표 A씨는 "유한양행, 한미약품 등도 수십년간 번 돈을 기반으로 현재 신약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며 "바이오 벤처도 '기술만 쫓아가기도 바쁜데 매출까지 내라고?' 하는 인식을 버리고 자체적인 생존 구조를 만들어야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연구개발을 끌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A씨는 또 "실적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신약 개발이 아닌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사업을 인수해 회사에 붙이는 것도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연구개발에 쓸 수 있는 돈을 스스로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술특례 상장 기업은 거래소 관리종목 지정을 유예받는다. 이에 유예기간 종료를 앞두고 수익 구조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M&A(인수합병)에 나서는 사례가 종종 있다.
A씨는 다만 "단기간 내 매출을 내야 한다는 목적에만 함몰되기보다 본질적인 기업의 경쟁력과 시너지가 날 만한 M&A를 추진해야 한다"며 "연구 역량 강화, 상업화, 해외시장 진출, 사업 영역 확대 등으로 인수 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오 업계가 시장과 소통을 강화해야 한단 의견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특히 바이오는 산업 특성상 경쟁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나 연구에 대해 투자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다른 업종보다 시장과 소통이 더 중요한 이유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일부 바이오 기업이 상장시 계획했던 것이 잘 안될 때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신뢰를 잃는 악순환이 벌어진 사례가 있다"며 "상장시 기술이전을 통한 수익 창출을 약속했다면 6개월 혹은 1년마다 '임상, 기술이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왜 계획대로 못 가고 있는지' 등 시장에 정보를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 일도 안 하다 5년이 지난 다음 '못했다, 미안해' 식으로 시장에 알리는 자세는 상장사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라며 "바이오가 시장과 호흡하고 진솔한 태도를 보여야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상장 전후 과정에서 금융당국 역할이 더 강화돼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금융감독원과 거래소에서 바이오 기술을 판단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영입하고 상장 이후에는 실적 중간 점검 등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특례상장 바이오가 IPO 당시 제시했던 실적을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별다른 조치를 받지 않는다. 뒤늦은 감사의견 거절로 거래정지에 처할 경우 애꿎은 개인투자자의 피해만 초래할 뿐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이나 규제기관의 역할이 지금보다 더 커지면 시장 자체가 경색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또 특례상장 기업이 3~5년치 추정 실적을 근거로 시가총액을 기계적으로 산정하는 현 방식도 보완이 필요하단 지적도 나온다. 공모시장의 평가에 앞서 장외에서 일부 벤처캐피탈이 주도해 평가한 기업가치를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가치 뻥튀기는 공모시장 투자자의 손실을 유발할 수 있다. 더구나 IPO 기업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개인투자자라면 더 그렇다.
이 때문에 IPO 주관사들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IB(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는 "기술에 대한 평가를 잘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금감원, 거래소에서 박사를 비롯한 전문인력을 영입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금감원이나 거래소의 박사급 전문인력이 IPO에 나서는 각 바이오 기업의 기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더구나 전문가의 상장 심사를 통과하고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인정 받은 바이오라면 이 회사가 기술적으로 훌륭하고 완전한 회사라는 메시지가 퍼질 수 있고 되레 투자자 보호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주관사는 기술적 전문가는 아니지만 실사를 나가면서 회사와 많은 대화를 하고 약속을 지키는지 등 오랜 기간 살펴보면서 신뢰가 가는 회사인지 아닌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며 "나스닥처럼 문제를 일으킨 회사와 연관이 있는 투자자, 주관사를 공개하고 주관사에는 특정 기간 동안 IPO 딜(거래)을 주간하는 데 있어서 터프하게 심사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