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김은숙 3.0', 그가 20년째 대중을 홀리는 방법

머니투데이 윤준호(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3.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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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파트2'더 글로리' 파트2


20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김은숙’이다. 2004년 ‘파리의 연인’으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장을 연지 어언 20년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 흘렀는데 김은숙 작가의 입지는 여전히 공고하다. 오히려 인고의 시간을 견딘 나이테를 두르며 더욱 단단한 아성을 쌓은 모양새다. 넷플릭스 역대 TV(非영어) 부문 누적 시청시간 6위에 오른 김 작가의 성과는 결코 운이 뒤따른 결과가 아니다. 20년을 걸어오며 몇 번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지만, 김 작가는 늘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다. 이쯤되면 ‘김은숙 3.0’이라 부를 만하다.

김은숙 작가의 근간은 당연히 로맨틱 코미디다. ‘파리의 연인’을 시작으로 ‘온에어’, ‘시크릿 가든’, ‘태양의 후예’ 등 내놓는 작품마다 소위 ‘대박’을 쳤다. 출연 배우들은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작품 속 대사는 그 해의 유행어로 자리매김했다. 누군가는 ‘김은숙의 말장난’라 칭한다. 하지만 그 말장난을 기필코 인구에 회자되는 유행어로 변주하는 힘이 김 작가에게는 있다. ‘개그 콘서트’ 속 툭 던져놓고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개그 코드가 아니라, 탄탄한 서사와 매력적인 이야기 위에 얹은 훌륭한 고명인 덕이다. 그 어려운 걸 매번 해내는 건, 대중의 코드를 20년째 정확히 읽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1.0 시대를 잘 매듭지은 김 작가는 ‘미스터 션샤인’으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며 2.0 시대의 문고리를 잡았다. 앞서 김 작가가 보여준 일련의 로맨틱 코미디 속 서사는 명확했다. 통상 까다롭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성이 등장하고, 여성은 대체로 신데렐라다. 전형적인 캔디 스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전형성에 김 작가 특유의 양념을 더하면 대중은 중독됐다. 그가 탁월한 ‘대중 드라마’ 작가인 이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중은 김 작가에게 ‘그 이상’을 바라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패턴에 식상함을 느낀 탓도 있다. 하지만 김 작가 정도 되는 크리에이터가 ‘시대 정신’을 뒤로 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작품을 보고 난 후 가슴 한 켠에 ‘남는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작가는 ‘미스터 션샤인’으로 그 깊이를 보여줬다. 흥미로운 말맛은 덜어낸 대신, 그 자리를 의미로 채웠다. 구한말 소란스럽고 어지러웠던 시대상을 조선에서 버림받은 후 미 해병대 장교로 금의환향한 유진 초이, 혼탁한 세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사대부 영애 고애신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정리했다. 그 방대한 스토리를 담느라 24부작으로 분량 또한 늘렸다.

'미스터 션샤인', 사진제공=tvN'미스터 션샤인', 사진제공=tvN
여성 캐릭터의 강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고애신(김태리)과 쿠도 히나(김민정)는 ‘미스터’라는 표현이 들어간 제목에 개의치 않고 구한말 자주적인 삶을 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견고하게 구축했다. 단언컨대, 로맨틱 코미디 장르 속에서 전형적으로 자리하는 남녀 관계를 깨고 ‘김은숙 2.0’으로 들어선 단계라 할 수 있다.


‘도깨비’ 역시 이 단계에 해당된다. 당시 케이블채널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도깨비’는 단순한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가 아니다. 죽음과 윤회, 죄와 벌, 인과 연을 깊이 있는 통찰했다. 불사(不死)가 저주일 수 있고, 망각이 신의 선물일 수 있다고 넌지시 던지는 김 작가의 메시지는 깊고 또 묵직했다.

그리고 이제 ‘더 글로리’다. ‘미스터 션샤인’에 김 작가의 역사적 시선이 담겼다면, ‘더 글로리’에는 사회적 시선이 포함된다. 고2가 되는 김 작가의 딸이 던진 질문 하나에서 비롯됐다는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학교 폭력(학폭)의 실상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처음에는 "도가 지나치게 극화했다"고 하던 이들도, ‘현실은 더 끔찍했다’는 학폭 관련 사회부 기사가 속속 보도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 작가는 3월 초 진행된 ‘더 글로리 파트2’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저한테는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딸이) 맞고 왔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면서 "‘더 글로리’의 동은(송혜교 분)은 그렇지 못하지 않냐. 이 세상의 동은이들은 거의 그렇지 못하다. 저처럼 돈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런 가정환경이 없을 거다. 그런 분들을 응원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역시 현실이었다.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들의 학폭 가해 사실이 드러내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법지식을 이용했다. 그 아들은 결국 서울대에 진학했지만, 피해 학생은 그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입시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현실과 ‘더 글로리’가 교차되는 지점 위에 선 대중은 김 작가의 혜안에 감탄한다. 픽션의 특성상 ‘더 글로리’는 주로 "재미있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학폭의 잔혹함과 가해자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적절한 힘이 작용됐는지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김은숙 작가, 사진제공=넷플릭스김은숙 작가, 사진제공=넷플릭스
‘더 글로리’가 김 작가에게 남다른 또 다른 이유는 ‘김은숙 3.0’을 공고히 해줄 확실한 파트너를 얻었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협동의 예술이다. 주로 ‘작가의 예술’로 불리지만, 그 대본을 제대로 구현해 낼 줄 아는 연출자를 만나야 영롱한 제 빛을 낸다. 김 작가가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거듭난 1.0 단계의 파트너는 신우철 PD였다.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도깨비’로 대변되는 2.0 단계의 옆자리는 이응복 PD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밀의 숲’으로 유명한 안길호 PD와 호흡을 맞추며 3.0 시대를 열었다.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김 작가는 크게 두 차례 대중과 엇박자를 냈다. 한번은 ‘상속자들’이고, 또 한번은 ‘더 킹’이다. ‘상속자들’은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국내 방송 당시 동시간대 방송되던 ‘비밀’에 밀렸고, 이전 작품만 못하다는 평가도 적잖았다. ‘더 킹’은 김 작가가 제시한 평행 세계부터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PPL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인상만 줬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기존 손발을 맞추던 연출자가 바뀌었을 때다. 그리고 김 작가는 다시 제 짝을 만났다.

김은숙 3.0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그가 집필한 첫 ‘19금 드라마’로서 이 관람등급이 부여한 자유를 마음껏 발휘한 김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세계를 파고들지 대중은 이미 궁금하다. 30대에 메인 작가로 자리잡은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50대가 된 후에도 시대를 관통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는 메시지를 낸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그래서 최근 김 작가가 넷플릭스를 통해 낸 소감은 더욱 짜릿하다. "대한민국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 저 지금 너무 신나요." 그리고 대중 역시, 김 작가가 신작을 낸다고 발표할 때마다 또 신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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