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1.0 시대를 잘 매듭지은 김 작가는 ‘미스터 션샤인’으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며 2.0 시대의 문고리를 잡았다. 앞서 김 작가가 보여준 일련의 로맨틱 코미디 속 서사는 명확했다. 통상 까다롭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성이 등장하고, 여성은 대체로 신데렐라다. 전형적인 캔디 스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전형성에 김 작가 특유의 양념을 더하면 대중은 중독됐다. 그가 탁월한 ‘대중 드라마’ 작가인 이유다.
김 작가는 ‘미스터 션샤인’으로 그 깊이를 보여줬다. 흥미로운 말맛은 덜어낸 대신, 그 자리를 의미로 채웠다. 구한말 소란스럽고 어지러웠던 시대상을 조선에서 버림받은 후 미 해병대 장교로 금의환향한 유진 초이, 혼탁한 세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사대부 영애 고애신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정리했다. 그 방대한 스토리를 담느라 24부작으로 분량 또한 늘렸다.

여성 캐릭터의 강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고애신(김태리)과 쿠도 히나(김민정)는 ‘미스터’라는 표현이 들어간 제목에 개의치 않고 구한말 자주적인 삶을 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견고하게 구축했다. 단언컨대, 로맨틱 코미디 장르 속에서 전형적으로 자리하는 남녀 관계를 깨고 ‘김은숙 2.0’으로 들어선 단계라 할 수 있다.
‘도깨비’ 역시 이 단계에 해당된다. 당시 케이블채널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도깨비’는 단순한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가 아니다. 죽음과 윤회, 죄와 벌, 인과 연을 깊이 있는 통찰했다. 불사(不死)가 저주일 수 있고, 망각이 신의 선물일 수 있다고 넌지시 던지는 김 작가의 메시지는 깊고 또 묵직했다.
그리고 이제 ‘더 글로리’다. ‘미스터 션샤인’에 김 작가의 역사적 시선이 담겼다면, ‘더 글로리’에는 사회적 시선이 포함된다. 고2가 되는 김 작가의 딸이 던진 질문 하나에서 비롯됐다는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학교 폭력(학폭)의 실상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처음에는 "도가 지나치게 극화했다"고 하던 이들도, ‘현실은 더 끔찍했다’는 학폭 관련 사회부 기사가 속속 보도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 작가는 3월 초 진행된 ‘더 글로리 파트2’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저한테는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딸이) 맞고 왔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면서 "‘더 글로리’의 동은(송혜교 분)은 그렇지 못하지 않냐. 이 세상의 동은이들은 거의 그렇지 못하다. 저처럼 돈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런 가정환경이 없을 거다. 그런 분들을 응원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역시 현실이었다.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들의 학폭 가해 사실이 드러내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법지식을 이용했다. 그 아들은 결국 서울대에 진학했지만, 피해 학생은 그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입시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현실과 ‘더 글로리’가 교차되는 지점 위에 선 대중은 김 작가의 혜안에 감탄한다. 픽션의 특성상 ‘더 글로리’는 주로 "재미있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학폭의 잔혹함과 가해자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적절한 힘이 작용됐는지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김 작가는 크게 두 차례 대중과 엇박자를 냈다. 한번은 ‘상속자들’이고, 또 한번은 ‘더 킹’이다. ‘상속자들’은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국내 방송 당시 동시간대 방송되던 ‘비밀’에 밀렸고, 이전 작품만 못하다는 평가도 적잖았다. ‘더 킹’은 김 작가가 제시한 평행 세계부터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PPL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인상만 줬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기존 손발을 맞추던 연출자가 바뀌었을 때다. 그리고 김 작가는 다시 제 짝을 만났다.
김은숙 3.0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그가 집필한 첫 ‘19금 드라마’로서 이 관람등급이 부여한 자유를 마음껏 발휘한 김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세계를 파고들지 대중은 이미 궁금하다. 30대에 메인 작가로 자리잡은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50대가 된 후에도 시대를 관통하며 대중의 호응을 얻는 메시지를 낸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그래서 최근 김 작가가 넷플릭스를 통해 낸 소감은 더욱 짜릿하다. "대한민국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 저 지금 너무 신나요." 그리고 대중 역시, 김 작가가 신작을 낸다고 발표할 때마다 또 신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