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 스위스는 왜 CS를 제물로 바쳤나

머니투데이 뉴욕=박준식 특파원 2023.03.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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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클래스] (6) 굿바이 크레디트스위스, 167년 투자은행의 몰락

편집자주 세계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부르는 뉴욕(NYC)과 맨해튼(Manhattan)에 대해 씁니다. 국방비만 일천조를 쓰는 미국과 그 중심의 경제, 문화, 예술, 의식주를 틈나는 대로 써봅니다. '천조국'에서 족적을 남긴 한국인의 분투기도 전합니다.

(베른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카린 켈러 서터 스위스 재무장관과 알랭 베르셋 내무장관, 악셀 레만 CS 이사회 의장, 콜름 켈러허 UBS 회장이 19일(현지시간) 베른에서 UBS가 크레디트스위스(CS)를 32억 달러에 인수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베른 로이터=뉴스1) 우동명 기자 = 카린 켈러 서터 스위스 재무장관과 알랭 베르셋 내무장관, 악셀 레만 CS 이사회 의장, 콜름 켈러허 UBS 회장이 19일(현지시간) 베른에서 UBS가 크레디트스위스(CS)를 32억 달러에 인수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위스가 167년 역사의 자국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200년 이상 영구 무장중립국으로 살아온 스위스마저도 거대한 러시아의 서진을 경계하면서 미국과 나토(NATO) 중심의 체계로 기울고 있다는 분석이다.

스위스는 지난 20일 크레디트스위스를 UBS가 인수합병(M&A) 한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강제합병이다. 약 두 세기동안 경쟁해왔던 자국의 글로벌 은행을 하나로 만드는 결정이었다. 사실 조건은 CS에는 너무 가혹했다. 지금이 평상시라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고, 경영진에게는 사실상 배임 책임을 물릴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럽은 진짜 전시(戰時)다. 날뛰는 북극곰과 그 위에 올라탄 지도자가 전술핵 미사일을 벨라루스에 포진하겠다고 서방을 위협하고 있다. 전쟁의 경계선에 위치한 폴란드는 실제로 오발탄이라고는 하지만 자국내로 포격을 얻어맞았다.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50개주 연합국가와 유럽의 나토 연합에 SOS를 치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수도 있는 기로다. 등 뒤에선 폐허가 돼 가는 우크라이나의 비명이 들린다.

스위스 재무장관 카린 켈러-서터는 이날 담담히 말했다. "크레디트스위스가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재무상의 건조한 멘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역사가 정부가 깊게 관여한 결정이며, 어쩌면 자신들도 주권 내에서 고려한 사항이 아니라 국가간 문제를 염려해 내린 피치 못할 차선책이란 의미로 읽혔다.



사실 스위스 정부는 CS를 UBS에 넘기기 직전까지도 스스로 살게 할 방안을 고민했다. 스위스는 추가투자를 거부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신에 500억 프랑(약 70조원)을 투입해 CS를 지원하기로 했었다. 약 200년 역사를 바라보는 세계 5대 은행에 올랐던 자국 금융사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대마불사의 수준이 아니라 국가 재정을 뒤흔들면서 나라가 그동안 지켜온 정체성까지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켈러-서터는 이후 스위스 언론(Neue Zurcher Zeitung) 인터뷰에서 "CS가 파산으로 치달았다면 아마도 국제 금융위기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은행을 구제하기 위한 작업은 일단 첫단주가 잘못 꿰매진 탓이 컸다. CS가 금융사로서 미국에서 헤지펀드와 패밀리오피스 프라임 브로커로 최근 수년 사이에 7조원이 넘는 손실을 본 것이 발단이었다. 금융사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은 유태계 금융경쟁권 사이에서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로인한 타격과 재무적 보충을 영미권이 아닌 중동에서 끌어들인 것이 문제가 됐다.

파산 직전까지 CS의 1, 2대 주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가 꿰찼다. 중립국이라는 정무적 위치를 발판으로 CS는 러시아나 중동, 북한 자금까지 운용하는 대범함을 보여왔다. 북한의 김정은도 스위스 유학파다. 지난해 CS를 포함해 스위스 비밀금고에 쌓인 외국인 예금은 3300조원이 넘는다. 이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자신의 자산 규모를 소속국가에 들키기 싫어하는 부정축재자들의 자산으로 지적된다. 심지어 러시아는 지난해 3월 국제결제시스템 축출로 인한 국가 디폴트 위기에서도 스위스 계좌를 활용해 위기를 모면했다. 로이터는 러시아 재벌들이 스위스에 보유한 자금이 260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1800년대부터 유럽 내에서 어느 편에 기울지 않는 중립국이라는 정치적 위치를 선점해왔던 이 알프스 국가는 세계가 다시 둘로 나뉘기 전까지 자신들이 누린 기득권을 충분히 누려왔던 셈이다.

하지만 냉정 종식 30년 만에 지구는 다시 분화하고 있다. WTO 체제 하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각각 화석 에너지와 값싼 제조업 노동의 수출로 국부를 쌓았다. 그리고 정치지형이 성숙되지 않는 채 누적돼 온 부(富)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쥐어진 칼날처럼 세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분업 효율화로 만들어진 자원이 군비증강과 범침 야욕을 자극해 인접국들에게는 악몽이 된 것이다.

경찰국가를 자청하면서도 중국의 남서진과 러시아의 유럽 침범의 역사를 간과했던 미국은 뒤늦었지만 해묵은 나토를 결집하고 있다. 그리고 독재자들의 사금고 역할을 하던 자기 진영 내의 금융 기득권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특혜가 내려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시에 적국의 수장들에게 군비를 대주는 꼴을 용납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다시 돌아와서 CS에 국립은행을 통해 500억 프랑을 지원하려던 스위스의 당초 계획은 이 나라의 '프랑'이라는 화폐가 48시간 사이에 지난 2년 간 가장 빠른 속도로 평가절하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울 수 있다는 비판이 내부에서 재기됐고, EU 국가들 아니 특히 나토 중심국들의 직간접 압박이 거세어졌다. 경제적으로 이미 하나가 된 이들이 프랑의 문제로 유로까지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못참았기 때문이다. 실제 환율 변동으로만 지켜봐도 투자가들은 프랑을 버리고 엔화를 사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위스와 모종의 거래를 해냈다. 스위스 프랑을 이른바 '달러의 방주'에 태운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19일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 캐나다은행(BOC), 일본은행(BOJ) 외에 마지막으로 스위스국립은행(SNB)과 달러 유동성 스와프를 강화하고 국제금융 공조를 약속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튿날 UBS의 CS 인수가 발표됐다.

미국은 자국의 국세청(IRS)을 통해 CS 매각 이후에도 그 자산을 사들인 UBS의 비밀금고 조사를 계속하겠다고 공공연히 언론과 전직 CS 출신 폭로자(whistleblowers)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적어도 탈세 미국인 명단과 규모 정도는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에게서 얻어내려는 것은 미국인 명단 수준은 분명 아닌 듯 싶다.

스위스 정부로서도 일단 CS가 파산하거나 타국 금융사에게로 넘어가 아예 벌거벗겨지는 결과는 일단 막은 셈이 됐다. 금융 주권을 지키면서 세계의 사금고라는 기득권을 UBS를 통해 마지노선상에서 유지할 수 있어서다. 스위스 정부는 UBS에 최대 1000억 스위스프랑(약 141조원)의 대출을 지원하고, 인수 위험을 줄이기 위해 90억 프랑(13조원)의 손실 보증도 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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