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펀드는 1921년 '미국 국제 증권 신탁'(The International Securities Trust of America). 신생 기업들이 펀드를 통해 자금을 손쉽게 조달하며 단기간 폭발적인 성장을 구가했고, 이 과실을 투자자들이 누리면서 미국은 펀드의 천국이 된다.
펀드시대 개막의 주역이었던 '바이 코리아' 펀드(1999년 현대증권-현대투신운용)가 대표적이다. 예금금리의 몇 곱절을 벌 수 있다는 마케팅과 외환위기를 견딘 한국기업의 부활을 믿는다는 애국심이 맞물려 반응이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4개월 만에 10조원 넘는 자금이 몰렸다. 당시 대치 은마아파트(1억5200만원, 102㎡) 6만6000여채 값이다. 1년 후 IT 버블이 꺼지고 부실기업 투자 및 주가조작 연루악재까지 나오며 펀드가 반토막 나는 참사가 벌어졌다.
펀드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게 손실 때문만은 아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다. 증시가 강하게 반등한 2020년 코스피와 코스닥지수는 각각 30.8%와 44.6% 상승했는데 정작 펀드 수익률은 10%대에 머문 게 수두룩했다. 수수료는 그렇다쳐도 한 명의 펀드매니저가 수십개의 펀드를 운영하고, 하나를 여러 명이 돌려 맡는 뺑뺑이 운용도 뒷맛이 안좋다. 성과가 좋은 매니저들은 자산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금을 유치하려 마케팅 현장에 투입되곤 한다.
얼마 전 의미가 큰 펀드가 나왔다. 사모펀드만 운용하던 VIP자산운용이 공모펀드 시장에 뛰어들며 출시한 'VIP 더 퍼스트' 펀드인데, 사전예약까지 몰리며 출시와 동시에 300억원이 완판돼 버렸다. 펀드이익은 고객이 먼저 가져가고, 손실은 자산운용사가 먼저 보는 손익차등 형태의 펀드다. 원금의 10% 이내 손실은 VIP자산운용이 떠안는다. 이익의 15%까지는 고객이 먼저 취하고 이후 수익은 운용사와 나눠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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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 가운데는 타임폴리오 자산운용이 2020년 손익 차등형 펀드를 선보인 바 있다. 3년간 20%대라는 나쁘지 않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신한자산운용이 펀드수익률에 따라 성과보수를 달리하는 펀드를 선보였다.
이런 펀드들이 큰 인기를 끄는건 수익률 때문이 아니다. 기저에 깔려있는 '신뢰'를 고객들도 느꼈기 때문이다. 운용사의 능력이 다르다 한들 절대 수익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객들이 왜 모르겠나. 설령 손실이 나도 고객들이 운용사에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신뢰(信賴)라는 한자에는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영어 트러스트(trust)의 어원은 '편안함'을 의미하는 독일어(trost)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편안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펀드가 더 많아지길 응원한다. 아울러 금융정책 및 감독당국에게도 작은 박수를 보낸다. 손익차등형 공모펀드는 2021년 정부가 출시한 국민참여형 뉴딜펀드가 첫번째 상품이었다. 당시 상품을 설계하며 실무자들이 흘렸던 땀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그때 뿌렸던 씨앗이 지금 발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