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뉴판은 없었다. 여자 바텐더는 "원하는 위스키 종류나 원하는 스타일을 말해달라"고 했다. 위스키를 시키면 블루베리 파이와 소고기 여섯점이 추가로 나온다. '이런 안주로 배가 부르느냐' 묻자 20대쯤 돼 보인 여성 손님은 "배가 부르지는 않지만 위스키 향을 느끼기에는 양과 종류가 적당하다"고 했다.

정씨 오른쪽 두자리 옆에는 이모씨(26)가 있었다. 이씨는 소주 등과 비교하면 위스키를 마시는 가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소주도 가격이 4000~5000원으로 싼 편은 아니지 않나"라며 "안주를 많이 시키기도 하고, 나름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위스키가 낫다"고 했다.
◇목수, 위스키 좋아 바텐더 됐다...혼자 마셔도, 함께 마셔도 좋다

1년 차 위스키 애호가 이승원씨(30)는 1인가구 증가를 위스키 열풍의 한 원인으로 꼽았다. 위스키는 집에서 혼자 먹기 좋았다. 와인과 달리 뚜껑을 다시 닫을 수 있다. 이씨는 "향이 풍부해서 조용히 혼자 먹기 좋다"며 "도수가 높아서 마시면 잠도 잘 온다"고 했다.
위스키를 함께 마시는 문화도 만들어졌다. 박모씨(25)는 서울 성수동에서 위스키 바텐더가 되기 전 목수였다. 건축 현장의 선배들은 밥 먹을 때 반주를 곁들였다. 한 사람당 소주 반병, 한병씩 마셨다. 저녁에는 이른바 '달렸다'. 박씨가 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주는 맛이 없고 매일 1~2병씩 마신 술값도 아까웠다.
박씨의 스물한살 생일에 아버지가 축하한다며 자신이 신혼여행 갔을 때 샀던 21년산 발렌타인 위스키를 꺼내왔다. 위스키는 통 밖에 꺼내면 숙성 연도로 치지 않는다. 향과 맛이 달랐다. 소주처럼 입에 털어넣지 않고 한모금 입에 머금은 뒤 향을 즐기는 매력이 있었다. 잔에 따라두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 왔더니 향이 달라져 있던 점도 재밌었다.
이후 박씨는 한달에 한번꼴로 위스키 바를 갔다. 그곳에서 세살 많은 남성과 친해졌다. 둘 다 도수가 높은 버번 위스키를 좋아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날을 정해서 만났다. 여기에 위스키 좋아하는 서로의 지인들이 더해져 지금은 단체메신저 방에 15명이 모였다. 많게는 1989년생, 적게는 2003년생 회원이 있다. 이들은 정기 모임을 하고 서로 산 위스키를 작은 병에 소분해서 나눠 마시기도 한다.
바텐더를 하면서 박씨는 20~30대 '위스키 열풍'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이전에는 주로 40~50대가 위스키바를 찾았지만 20~30대 친구, 연인들이 바를 찾는다. 그는 위스키 열풍을 두고 "누군가는 젊은 세대의 철없는 돈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소주보다 돈이 크게 더 드는 것도 아니고 종류가 다양하고 위스키마다 매력이 달라서 공부하는 재미,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즐기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스키 강국 부상한 인도와 대만...한국은 왜 뒤처졌나

10일 시장조사업체 퓨처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위스키 시장 규모는 2022년 809억달러에서 연평균 12.4% 성장해 2032년 5503억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 같은 성장세는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 소비량 증가와 맞물려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1년 위스키 소비 규모는 인도가 17억663만리터(ℓ)로 가장 많았고 이어 미국(6억203만리터) 일본(1억5100만리터) 프랑스(1억3001만리터) 영국(7494만리터) 순이었다. 한국의 소비량은 2021년 기준 940만리터로 주요국에 못 미친다.
◇위스키 제조 불리한 기후 극복한 인도와 대만…한국은 수입 의존 구조 고착화
인도와 대만은 고온 다습한 기후로 당초 위스키 제조에 부적합한 지역으로 인식돼 왔다. 위스키는 곡물을 증류한 술인데 기온이 높으면 알코올이 빠르게 증발해 제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위스키 종주국인 스코틀랜드는 연간 증발하는 위스키 원액량이 1~2%이나 인도나 대만 등 아열대 기후에선 연간 15~20% 증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30년간 숙성한 고급 위스키를 생산하기 어려운 환경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인도와 대만은 각자의 생산 방식을 구축해 경쟁력을 확보했다.
인도는 1987년부터 증류소에서 보리 맥아로 만든 정통 싱글 몰트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인도산 몰트 75%와 스코틀랜드 수입 몰트 25%를 섞어 숙성한 '암룻 퓨전(Amrut Fusion)'은 '위스키 바이블'의 저자 짐 머레이가 2010년 "100점 만점에 97점"이라고 평가하며 세계 3대 위스키로 꼽아 명성을 얻었다. 맵고 짭짤한 인도 특유의 맛을 지닌 이 제품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위스키 시장으로 수출된다.
12억 인구가 뒷받침하는 거대한 내수 시장도 인도 위스키의 강점이다. 연간 1500만 케이스 이상 팔리는 조니워커, 잭다니엘 등 유명 위스키 판매량도 인도 내수시장 인기 브랜드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단기 숙성 방식이 오히려 신선한 맛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발란 위스키는 2010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위스키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벤트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유명 위스키 평론가들은 카발란에 열대과일잼 같은 독특한 향기가 있다고 호평한다. 카발란 양조장은 대만의 주요 관광 코스로도 개발돼 '일석이조' 효과를 내고 있다.
한국도 한때 위스키 산업에 도전했다. 1980년대 초반 진로와 오비, 백화양조 등이 수년간 국산 위스키 제조를 시도했다. 하지만 증발량이 많고 수입하는 게 더 효율적이란 판단으로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인도와 대만 사례를 보면 이 기간의 개발 공백은 아쉽다. 다만 최근 롯데, 신세계 등 대기업이 자체 증류소 건립에 나섰고 김창수 위스키 등 국내 생산 브랜드가 점차 늘어나면서 반등 기회로 여겨진다.

국내 위스키 수요도 되살아나는 추세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스카치 등 위스키류 수입액은 2억6684만달러로 전년(1억7354억달러) 대비 52.2% 증가했다. 2007년(2억7029만달러) 이후 15년 만에 최대치다.
다만 업계에선 국내 위스키 자체 생산 확대를 위해 주세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위스키는 현재 가격에 비례해 세금을 책정하는 '종가세' 구조다. 술 가격이 비쌀수록 세금이 더 붙는다. 현행법상 위스키 등 증류주에 붙는 세율은 72%에 달한다. 주세의 30%인 교육세와 10%의 부가세를 더하면 원가의 약 103%가 세금이다. 국내 출고가 10만원짜리 위스키라면 세금만 10만원이 넘는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위스키도 맥주처럼 알코올 도수와 양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 일본 등 해외 주요 국가는 대부분 종량세를 적용하며, 국산 위스키 산업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부는 신중한 입장이다. 소주 등 종가세를 채택한 저가 주류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고 세수 감소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증류주에 종량세를 적용하면 소주 등 저가주는 세부담이 올라가고 위스키 등 고가주는 세금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며 "위스키는 아무래도 고가주에 속해 종량세를 요구하는 입장도 이해되지만, 소주를 비롯한 다른 증류주와의 형평성 문제가 있고 업계 이해관계, 소비자 부담 등이 맞물려 있어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증류주의 종량세 개편은 중장기 과제로 당장 변경할 가능성이 작다"고 덧붙였다.
'술꾼' 이 남자가 만든 토종 위스키 뭐길래…"투자자도 줄섰다"한국인이 처음 만든 위스키, 김창수 대표 인터뷰

위런을 일으킨 그 한국산 위스키를 만든 이가 김창수(37세) 김창수위스키증류소(이하 김창수위스키) 대표다.
한국산 위스키는 태동기다. 아직 국내에 대형화된 위스키 제조기업은 없지만 김창수위스키처럼 개인이 운영하는 증류소가 하나둘씩 도전을 시작하는 단계다.
1986년생인 김창수 대표는 위스키 제조 불모지인 한국에서 선구자로 손꼽힌다. 국내에서 위스키를 직접 제조·판매한 첫번째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방영된 한 TV 프로그램에서 한방울만 떨어트린 10여종의 위스키를 후각만으로 정확하게 알아맞춰 달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가 위스키 제조에 입문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출시된 술을 모두 마셨을만큼 술을 좋아했던 김 대표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금산인삼주 김창수 명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20살 때부터 술을 직접 만들었다. 막걸리, 청주, 전통주를 거쳐 국내에 제조방식이 알려지지 않은 위스키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처음 접했을 때 신선한 맛과 향의 매력에 빠졌다"며 "일본과 대만도 만드는 위스키를 한국만 못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도전욕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스키 제조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러 증류소에 견학 제안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열달간 중소기업에서 일한 월급을 모은 1000만원을 들고 위스키의 고장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한국에서 중고로 산 15만원짜리 자전거에 텐트 등 60kg 짐을 싣고 4개월 반동안 102개 증류소를 찾아 다녔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마지막 증류소에서도 거절당한 후 위로차 들른 글래스고의 한 바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는다. 바에서 만난 동양인 남성이 우연히 그가 첫 입사지원서를 낸 일본 치치부 증류소 직원이었다. 일본의 벤처 증류소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를 인연으로 2년 뒤 방문의 기회를 얻었고, 이 때 위스키 제조 기술을 배우게 됐다.

10억원은 증류소 짓기에 큰 돈은 아니었다. 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캐스크(오크통)의 개당 가격은 100만원까지 붙는다. 김창수 증류소에는 이런 캐스크가 200개 정도 있다. 가건물로 지어진 증류소는 누군가 창고로 쓰던 곳을 그대로 사용한다. 제조 설비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조립했다. 위스키 제조 면허를 받기 위해 숱하게 발품도 팔았다. 특히 위스키 제조면허는 사례가 없다보니 행정절차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김 대표는 "2021년 1월 제조면허를 받았을 때 가장 기뻤다"면서 "돈을 들이면 보다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몸으로 때우다보니 어느하나 쉬운게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김 대표의 일정표는 빽빽하다. 한국산 위스키의 출현에 대중이 반응하자 자본의 관심도 커져서다. 지난달에만 약 50여곳에서 투자 제의가 왔다. 하루 4번 투자자 미팅을 한 날도 있을 정도다. 지난해 11월 안동시와 200억원 규모의 투자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안동에 위스키 제2공장과 프리미엄 소주, 전통주 생산시설 설치에 대한 협약을 진행 중이다.
김창수위스키는 3호 캐스크까지 완판됐다. 하나의 캐스크에는 700ml 기준 300병의 위스키가 나온다. 수년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법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털어놓는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꿈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 대표는 "안동 외에도 여러 곳의 지자체에서 문의가 와 있지만 아직까지 투자나 공장 증설에 대해 확정하지 않았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신제품에 대해선"숙성 3년이 지나는 내년부터 위스키다운 위스키를 선보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