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나쁜 이웃과 사는 방법[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3.03.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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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일본 왕실 가계도/사진=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일본 왕실 가계도


"일본엔 왕(King)이 없어요!"

지난해 9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Queen Elizabeth II) 서거 때 호주 시드니의 한 주민센터 강좌에 참가할 때 일이다.

80대의 영국계 호주 강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를 안타까워하며 한국과 일본에는 왕(King)이 있는지를 물었다. 먼저 질문을 받은 기자가 "한국에서 왕은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사라졌고, 일본엔 여전히 상징적 왕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그 때 수업을 같이 듣던 20대 후반의 일본 여성이 일본엔 'King'이 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왕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 있다며 휴대폰으로 다른 단어를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만면에 미소와 함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Emperor(황제)"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문제점을 교육 받아온 기자 입장에서 적잖이 놀랐다. 전쟁의 역사를 모르는 20대 젊은 일본인의 입에서 타국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말을 자랑스럽게 얘기해서다. 이런 일반 정서로 볼 때 일본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변하지 않는 이런 이웃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이 미국에게만 '배를 드러내는 것'은 2차 대전 당시 그 힘(원자폭탄)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 때문이다. '관계 나쁜 이웃'과 잘 살아가는 방법은 상호간의 믿음이 아니라 힘에 있다.

2019년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무기로 우리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한 후 1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최고위 임원에게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그래도 일본의 반도체 원자재 수출금지를 잘 버티고 나름대로 국산화 기술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고.


그의 답은 의외였다. "일본이 잽만 날려서 견딜만했다"며 "제대로된 KO펀치를 날렸다면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일본의 기술력과 국력은 우리보다 한참 비교우위다. 우리가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긴 하지만 반도체 핵심 원료와 재료를 무기로 우리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이런 힘이 기반이 됐다.

우리가 1990년대 초반 일본으로부터 메모리반도체(D램 등) 지배력을 뺏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2가지다. 첫번째는 국제정세의 도움이다. 미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일본을 견제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부지리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는 수모를 감내하며 우리 기업인들이 이룬 끊임없는 기술확보 노력 덕분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 기업에 고개를 숙이고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머리 속으로 외운 기술들을 정리해 나가던 노력들이다.

우리는 '나쁜 버릇'을 바꾸지 않는 이웃과 같은 배를 탄 상황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도광양회(韜光養晦) 해야 한다. 딱딱한 장작더미 위에 잠을 자고 쓴 쓸개를 씹으며 '얼굴엔 미소를 띄되 가슴엔 칼을 품고' 인내해야 한다.

언젠가는 이겨내기 위해 우리 내부부터 힘을 모으고 견뎌야 한다. 힘없는 정의는 공허하다. 정의는 상대와 힘이 엇비슷할 때 실현될 수 있다. 요구와 협상은 그 때 가능하다. 이것이 국제사회 힘의 논리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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