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전쟁에 낀 韓, "고래 싸움에 등 터질 판"[차이나는 중국]

머니투데이 김재현 전문위원 2023.03.05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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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반도체법 핵심은 국가안보, 일자리는 덤…
韓기업들 中 생산 반도체에 기술 한도 예고,
당근 안 받아도 채찍은 못 피해 '진퇴양난'

편집자주 차이 나는 중국을 불편부당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2018년 8월 방문했던 삼성전자 시안1공장 건물 로비/사진=필자2018년 8월 방문했던 삼성전자 시안1공장 건물 로비/사진=필자


2018년 여름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견학한 적이 있다. 그때 팹(Fab) 내부는 들어가지 못하고 웨이퍼가 놓여있는 전시실을 구경한 후 회의실에서 회사 소개를 들었다. 우리 일행 뒤로 중국 공무원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 방문하는 등 당시 시안공장은 중국인들이 견학하고 싶어하는 1순위 사업장이었다.

이때 삼성전자의 시안1공장 매출액이 2017년 기준 269억 위안(약 5조원)을 기록했으며 2공장 건설을 위해 1단계로 7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2019년 2단계로 80억 달러를 추가 투자했으며 2022년 2월부터 시안2공장에서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13만장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2012년부터 시안에 쏟아부은 돈만 258억 달러(약 33조5400억원)다.



현재 시안1·2공장은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약 40%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비록 투자금액은 크지만, 평범한 성공 스토리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미국 정부가 반도체 투자에 대한 재정지원 527억 달러를 포함한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발효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이 몰고온 여파를 점검해보자.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형성이 목표
미·중 반도체 전쟁에 낀 韓, "고래 싸움에 등 터질 판"[차이나는 중국]
지난 28일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기금 지원 공고(NOFO·Notice of Funding Opportunity)를 공개했다. 먼저 기금 지원 공고는 "반도체 생산지원금 프로그램은 미국의 경제 안보와 국가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경제적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반도체지원법은 위의 목표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항목도 강조했다. 즉 △반도체 공급망의 안전성과 회복력 강화, 격차 축소 및 취약성 완화 포함 △국가 안보에 적절한 반도체 공급 보장 △반도체 기술에서의 미국의 주도권 강화 △미국 경제 성장과 미국의 일자리 창출 지원이다.

위의 4가지를 보면 미국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인다. 즉,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을 형성해서 국가 안보에 필요한 반도체 공급을 보장받고 미국의 반도체 주도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도 미국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은 덤이다.


이번 기금 지원 공고에서 눈여겨볼 단어는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다. 이 단어는 75페이지에 달하는 공고에서 52번이나 등장하며 핵심 키워드임을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게 390억 달러, 연구개발(R&D)에 130억 달러 이상을 지원할 계획인데 요구 조건이 제법 까다롭다. 설비투자 금액의 5~15% 수준, 최대 35%에 달하는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보조금 수혜 기업은 보조금으로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지급을 할 수 없고 노조에 가입한 현지 근로자를 고용하는 한편 미국산 철강을 사용해야 한다.

또 1억5000만 달러가 넘는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향후 수익이 전망치를 월등히 초과할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에 달하는 초과수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하며 △회사 내 육아시설 설치도 의무사항이다.

특히 미국은 보조금 수혜 기업이 10년간 중국 등 우려국과 공동연구 또는 우려국 내 반도체 설비 증설을 금지하는 가드레일(Guardrail·안전장치) 조항을 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중국에 진출해 있는 우리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조만간 미국은 가드레일 조항의 세부내용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던지는 당근과 채찍
미국은 중국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디커플링(분리)시키기 위해 삼성전자·TSMC 등 외국 반도체 업체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반도체 지원법은 외국 반도체 기업에게 보조금, 즉 당근을 줘서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동참시키려는 계획이다.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2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주지사 관저에서 존 코닌 상원의원(왼쪽부터), 그랙 애벗 텍사스 주지사,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전자의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부지로 텍사스주 테일러시를 최종 선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테일러시에 세워지는 신규 라인은 내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4년 하반기 목표로 가동될 예정으로, 건설·설비 등 예상 투자 규모는 170억달러(약 20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삼성전자 제공) 2021.11.24/뉴스1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2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주지사 관저에서 존 코닌 상원의원(왼쪽부터), 그랙 애벗 텍사스 주지사,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전자의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부지로 텍사스주 테일러시를 최종 선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테일러시에 세워지는 신규 라인은 내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4년 하반기 목표로 가동될 예정으로, 건설·설비 등 예상 투자 규모는 170억달러(약 20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삼성전자 제공) 2021.11.24/뉴스1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150억 달러를 투입해 미국에 반도체 후공정 및 R&D센터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대만 TSMC도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지난해말 투자규모를 12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당근보다 더 강력한 건 채찍이다. 지난해 10월 미 상무부 산업안전국(BIS)은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 이하 시스템 반도체 생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한다고 밝혔다. 다행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은 1년간 유예조치를 통해 장비 수입의 예외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에게 유예기간 연장을 요청하는 협상중인 가운데 지난 23일 예상치 못한 뉴스가 보도됐다. 이날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경제안보포럼에 참석한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이 "(중국에서) 한국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cap on level)를 둘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시안 공장에서 전체 낸드플래시 출하량의 약 40%를, SK하이닉스가 우시공장에서 전체 D램 출하량의 약 50%를 생산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SK하이닉스가 2020년까지 중국에 투자한 금액은 249억 달러에 달한다.

더구나 SK하이닉스는 2020년 10월 90억 달러를 주고 인텔로부터 중국 다롄의 낸드플래시 공장을 인수하며 중국 사업 비중이 확대돼 더 난감한 상황이다. 지난 28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반도체업체들이 미중 갈등이 고조되자 근래 중국 투자를 줄였다며 인텔이 다롄 공장을 매각한 사실을 들었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아쉬운 타이밍이다.

미국 반도체지원법 보조금의 독소조항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중국 반도체 공급망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분리시키겠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다. 당근(보조금)은 굳이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겠지만,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한 채찍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중국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도 없다.

2018년 여름 방문했던 삼성전자 시안공장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번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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