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ㅣ땅속부터 하늘위까지 수시로 오가는 '연기의 신'

머니투데이 김형석(영화평론가) ize 기자 2023.03.01 12:45
글자크기

안주와 정체란 없는 여전히 진행형인 열정의 화신!

사진제공=매니지먼트숲사진제공=매니지먼트숲


개인적으로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의 명장면이 아닌 어느 유튜브 채널 영상이다. JTBC 드라마 '인간실격' 방송 즈음에 출연한 그는 9살 소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때 드라마 대사를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되지 못했고, 잘못 지은 건물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이때 전도연은 “갑자기 슬프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드라마 캐릭터를 떠올렸기에 울컥했던 것 같진 않았다. 천진한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아이와, 그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와, 그러면서 만들어진 현장의 분위기. 그 공기 안에서 드라마의 대사를 되새길 때 만들어진 복잡미묘한 감정. 그리고 그 상황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전도연의 내면이 만들어낸, 진심의 순간 같은 것이었다.



사진출처=유튜브 채널 'ODG' 방송 영상 캡처사진출처=유튜브 채널 'ODG' 방송 영상 캡처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모든 건 ‘감정의 집중도’로 수렴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연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면, 그의 표정이나 액션이 만들어낸 이미지보다는, 그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 때문이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2023)처럼 편안한 일상의 톤이든, 영화 '길복순'(2023)처럼 격렬한 장르 영화든 상관없다. 유튜브 동영상에서 갑자기 흘린 눈물처럼, 그가 작품 안에서 표현하는 캐릭터의 감정은 진짜다. 배우의 연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관객에게 그러한 진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이 목적에 전도연만큼 충실한 배우는 만나기 힘들다. 그를 ‘독보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내 마음의 풍금(1999년)스틸;내 마음의 풍금(1999년)스틸
30년 전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연기 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전도연은 변신하기보다는 캐릭터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의 연기자다. 물론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의 시골 소녀부터 '길복순'의 킬러까지, 캐릭터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 그런데 그 역할을 연기하는 전도연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완벽주의자’의 방법론? 1990년대 초 드라마에 출연하던 시절이나, 1997년 첫 영화 '접속'을 찍었을 때나, '밀양'(2007)으로 칸영화제 여자배우상을 수상했던 순간이나,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금이나 그 태도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어떤 연기의 디테일이라도 대충하지 않고 야무지게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 넣으려는 의지. 이것은 그를 지탱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밀양'(2007) 스틸'밀양'(2007) 스틸

그렇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달라진 건 깊이다. 필모그래피가 이어질수록, 그가 작품 속에서 견뎌야 할 감정의 하중과 슬픔의 강도와 트라우마의 고통은 점점 무거워졌다. 첫 영화 '접속'에서 사랑의 아픔을 지닌 여인이었던 그는, 10년 후 '밀양'을 만난다. 단지 ‘연기를 잘 한다’의 수준으로 소화할 수 없는, 해답 없이 거대한 벽에 도전하는 듯한 역할이었고, 어쩌면 어떤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이후 한국영화계엔 ‘전도연만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표현이 은연중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2013) '무뢰한'(2015)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 그리고 최근작 '길복순'처럼 한 여성의 인생역정을 담아내는 서사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감당해내거나, '생일'(2019)처럼 인간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연기를 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가 된 것이다.

영화 '생일'(2019년) 스틸영화 '생일'(2019년) 스틸
조금 놀라운 것은, 그가 점점 육체적으로 고단한 캐릭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준한 자기 관리의 결과물이겠지만,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의 느낌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엣지 있어 보인다. '길복순'의 하드코어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맨스 드라마라곤 하지만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고 은근히 몸 쓰는 장면이 많은 '일타 스캔들'에서도 전도연의 활력은 여전하다.

‘경력 30년’을 넘어선 전도연은 자신만의 연기 톤과 감정선을 관객에게 확고하게 인식시킨 소수의 배우 중 한 명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섰을 때 흔히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인데, 그는 일찌감치 그 위험성에 대해 깨달았고, 그런 이유로 향후 전도연의 필모그래피가 그렇게 우려되지 않는다. '밀양'으로 ‘칸의 여왕’이 되었을 때,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대해 그는 영화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그런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한테 주는 타이틀도 싫고, 그게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고. 나는 아직 할 게 더 많고 안 한 게 더 많은데, 너무 단순하게 왜 그것이 최고의 순간이고 이제 더 이상 전도연한테 무엇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계속 진행 중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상을 마침표라고 생각하면, 저는 스스로 쉼표하고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어요.” 여전히 진행중인 어느 배우의 연기 여정. 그래서 우린 여전히 전도연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