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고, 안보 불안은 냉전 이후 최고조로 치달았다.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각국은 너도나도 국방비 증액을 선언하고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군비 확장과는 거리를 둬왔던 독일과 일본도 군사력 확장에 힘을 쏟는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군비 확장이 또 다른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상황. '안보 딜레마'에 빠진 세계, 출구는 있을까.

◇"우크라 보니 불안하네…" 군사력에 '투자' 나섰다
미국, 독일 등 전 세계 주요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국방 예산부터 크게 늘리고 있다. 위기감이 국방력 강화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이미 방위산업체들이 특수를 누리는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 등에 따르면 미국의 2023년 회계연도(2022년 10월~2023년 9월) 국방 예산은 8580억달러(1118조원)로 전년도 대비 10% 증가했다. 미국 국방비는 2011년도를 정점으로 줄었다가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한 2016년도부터 다시 늘었는데, 증가세로 돌아선 뒤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과 전략적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지난해 국방 예산을 7% 증액했다. 액수로 따지면 미국 다음으로 많다. 중국의 국방비는 경제성장에 비례해 계속 늘었고 그 결과 지난 20년간 10배 급증했다.
그간 국가 안보 정책 강화에 소홀했던 유럽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전범국 독일의 움직임이다. 독일은 그간 국내총생산(GDP)의 1%가량을 국방비로 지출해왔는데, 이 비율을 2%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각종 기금 지출을 포함하면 국방비가 전년보다 17%가량 증액되는 셈이다. 지난해 6월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1000억유로 규모의 특별방위기금을 조성해 곳간을 채웠다.
과거 소련의 침공 경험이 있고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방위력 증강을 위해 내년 군사비 지출을 기존의 두 배 이상인 1380억즈워티(약 40조원)로 늘리고, 병력도 5년 안에 현재 14만3500명에서 30만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강할 방침이다.
또 다른 전범국 일본은 적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을 보유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재무장에 나섰다는 평가다. 방위비는 기존 GDP 1% 이내에서 2027년까지 2%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 목표가 실현되면 일본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군사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2023 회계연도 방위비는 전년보다 26% 증액한 6조8000억엔으로 편성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군사력 확장이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부채질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안킷 판다 카네기 국제평화기금 선임연구원은 CNN에 "(일본의 움직임으로 인해) 북한, 중국 등이 인지하는 위협이 강화할 것"이라며 "동아시아에서 이런 역학 관계가 더 심화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는 급변하는 군비 경쟁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올해 국방비를 지난해보다 4.4% 늘린 57조143억원으로 잡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사회의 핵 군축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핵무장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핵보유국 러시아에 침공당하는 걸 목격하면서다. 우크라이나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었지만,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으로부터 주권과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핵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1996년 6월에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 비핵화를 완료했다.
대만에서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면서 핵무장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장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만도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라오홍샹 전 대만 국방대 교수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도 핵무기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보면서도 비슷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바로 핵 보유의 중요성이다. 한국에는 핵보유국이 미보유국인 이웃나라를 침공했을 때 핵전쟁으로 확산할 것을 우려한 국제사회가 개입을 피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북한에는 자체적인 핵 억제력 보유의 이점을 보여줬다.
국내에서는 보수층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론이 확산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이를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에서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져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핵무기 통제조약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New START)도 답보 상태다. 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는 이 협정에 따른 핵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안기려 하는 만큼, 뉴스타트 조약 이행과 추가 연장 논의에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긴장 고조로 지난 35년간 감소했던 전 세계 핵무기가 향후 10년에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가 세계 핵전략의 향배를 가르는 변곡점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싱크탱크 벨퍼센터의 마리아나 부제린 연구원은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하면 '핵 아마겟돈' 없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패하면 세계 군축 비확산 체제로 가는 길은 끝장날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군축 협상에서 등가 맞교환 방식을 고집하는 대신 상호 수준에 맞는 합의를 이뤄내는 것도 방법이란 것이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핵 전문가 헤더 윌리엄스 박사는 포린폴리시를 통해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계 운용을 제한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미사일 투발 수단을 제한하는 방안도 옵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혈 전쟁 1년의 기록…언제 어떻게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마주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세계 경제는 에너지와 식량 위기로 신음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난민이 발생했고, '언제든 핵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러시아의 위협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교착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출구 없는 출혈 전쟁'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전장으로 미국 등 서방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북한·이란 등 진영이 양분돼 세계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폐허로 변한 우크라…러시아도 웃지 못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건 예상 외로 허술한 러시아군의 조직력만이 아니었다. 수도 키이우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우크라이나군의 거센 반격과 투지에 국제사회는 감탄했다. 동맹이 아닌 우크라이나를 위해 직접 나설 수는 없지만 미국 등 서방국들의 무기 지원이 잇따랐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등을 앞세워 하르키우·헤르손 등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를 속속 탈환하는 등 전세가 뒤집혔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상당수 도시가 폐허로 변했고, 인명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전쟁 발발 이후 지난달 말 기준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상자는 1만8657명(사망자 7110명)에 달한다. 삶의 터전을 잃고 해외로 피신한 우크라이나 난민은 1790만명이다. 미 국방부는 이 전쟁으로 지난 1년간 양국 군인 2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손발 묶인 러, 중국·인도가 숨통 틔웠다

경제 분야 초강력 제재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퇴출 조치로 미국·영국 등 은행에 예치했던 달러 자산이 묶이면서 지난해 러시아는 104년 만에 국가부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러시아 사업을 철수하거나 중단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의약품 등 필수 수입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도 글로벌 기업들이 단기간에 러시아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으며,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수준을 회복하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 북한, 이란 등이 위기에 처한 러시아의 든든한 뒷배로 떠올랐다. 서방국의 보이콧으로 판로를 잃은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를 중국과 인도가 지속적으로 수입하면서 러시아 경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과 이란 등은 무기 등 군사장비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돕고 있다.
◇출혈 전쟁의 끝, 아무도 모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상이 지난해 4월 2일을 끝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전쟁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을 뒷받침한다. 전쟁 초기 양국의 중재를 위해 나섰던 주요국 지도자들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손을 놨다.


오는 2024년 미국 대선이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있다. 이미 미 공화당과 일부 국민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만큼 미국의 지원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상에서의 어떤 군사작전보다 미국 대선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며 "미국과 유럽 주요국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중단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짚었다.


냉철한 정세 판단이 오히려 개전 초기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의 파상 공세를 1년이나 견딘 우크라이나의 저력은 전쟁 기간 내내 주목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도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 등으로 힘을 보탰다. 다만 전문가 사이에선 "러시아가 시작부터 이긴 싸움"이라며 현단계보다 대러 압박을 강화하는 게 국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재자론 안 통하는 신냉전 시대라는데…서방 기대에도 무기는 지원 안해

다만 위 전 대사는 "지정학적인 여건에서 대 중국·러시아 관계, 한반도의 평화 안정, 비핵화, 통일을 고려하면 주변 국가들과 크게 척을 질 수는 없다"며 한국 외교의 좌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무기 직접지원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가치 외교, 자유 수호같은 얘기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미국 등 서방의 기대를 크게 올려놨다"며 "그런 대외적인 천명과 무기 수출을 하지 않는 입장 사이에서 보이는 괴리가 난제"라고 했다.
◇핵 포기하니 침공당한 우크라…꼬인 대북 협상 숙제

박원곤 교수는 한국의 대우크라이나 무기 직접지원론에 대해 "개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부가 안 하기로 결정을 한 상황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했다.
◇전차 비싸게 만들어도 드론에 나가 떨어졌다

한설 전 소장은 이번 전쟁의 결말에 대해서는 "러시아는 한 70% 정도의 (우크라이나) 군사 기지를 다 파괴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이겨놓고 전쟁을 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좀 더 방어를 잘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고 했다. 한설 전 소장은 "한국이 무기를 직접 지원하면 교전 당사국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직접지원 불가론을 주장했다.
◇적 안 만드는 게 좋지만…동맹 美와 관계도 살펴야

러시아가 승전해도 미중 갈등에서 미국의 우위가 변함이 없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박기순 고문은 "러시아의 토지가 우크라를 가져가면 결국 유럽까지 더 확대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경우 러시아가 살아난다는 얘기"라면서도 "워낙 무기 소진 등에 있어 러시아의 힘이 빠지고, 미중 간 충돌에서 미국이 우세할 것"이라고 했다.
러·우전쟁 1년, 애 끓는 전자업계…"삼성·LG 대신 샤오미 쓴다"

17일 한 전자업계 인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앞두고 국내 전자·반도체업체에 끼친 영향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전쟁 장기화로 물류 차질과 원자재 값이 오른 데 이어 현지 공장·법인까지 '올스톱' 되면서 국내 기업의 매출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내 전자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지키던 국내 기업들은 0% 대 점유율에 허덕이는 반면 중국 기업들은 틈새를 노려 점유율을 늘렸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삼성 스마트폰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0% 수준이다. 4월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26%로 모든 기업 중 1위였다.
LG전자도 러시아 지역의 매출이 급감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LG전자의 러시아를 포함한 지역 매출은 1조 759억원으로, 전년 동기(1조 3885억원)에 비해 3000억원 이상 줄었다. 2021년 19%의 점유율로 삼성전자(27%)에 이어 2위를 차지했던 TV 생산 공장도 가동을 멈췄다. 현지 1위인 세탁기·냉장고 등 주요 가전제품 공급도 중단했다. LG전자 관계자는 "공장 재가동 여부는 정해진 바 없다"고 말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글로벌 수요 급감으로 전체 매출도 악화됐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생활가전 부문의 매출이 감소했고, 재고자산은 사상 처음으로 50조원대를 돌파했다.LG전자의 생활가전을 담당하는 H&A 사업본부도 지난해 영업이익이 48.9% 줄었다. TV를 맡는 HE사업본부의 영업이익은 99.5% 급감했다. 이정희 HE경영관리담당 상무는 "러·우 전쟁 장기화로 소비심리가 악화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빈 자리는 중국이 메웠다.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해 있는 샤오미·리얼미·아너 등 중국 기업의 점유율 합계는 3분의 2에 달한다.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샤오미와 리얼미 등을 합친 것보다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높았다. 러시아의 중국산 생활가전·반도체 등의 수입도 크게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3~9월 중국의 대러 반도체 수출은 5억 달러로 2021년 전체(2억 달러)보다 많다.
업계는 현지 공장과 법인 가동이 멈춰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국내 기업의 시장 재진입이 어려울 수 있다고 걱정한다. 러시아 시장이 차지하는 매출액도 많지만, 러시아 내 제품 공장이 독립국가연합(CIS)등 인근 국가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어 철수할 경우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게 된다. 삼성전자는 러시아 칼루가주에 TV·모니터 생산공장을, LG전자는 7000억원을 투입해 루자 공장과 현지 법인을 운영해 왔다.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는 동유럽 시장 공략의 전초기지로 주요 수출 대상국 중 하나였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는 등 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라며 "국내 기업이 그간 투자한 비용은 물론 향후 동유럽 수출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