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 교수
대학에 입학하던 1983년 봄 처음 발을 디딘 서울은 낯선 얼굴들과 차가운 바람의 도시였다. 그해 5월쯤 어둠이 내리는 산기슭의 기숙사로 걸어 올라가던 길에 대학축제에 초청된 밴드가 연주하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들었다. 초저녁 무렵의 공기를 타고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기타의 선율 속에서 내가 떠나온 고향의 모습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던 그 시절의 감정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서구와의 지리적 단절 아래 한국적 사회과학을 구축한다는 야망에 동조했던 나도 세계화의 바람에 밀려 뒤늦게 유학을 떠났다. 1980년대에 우리가 공유한 꿈과 희망이 어떤 보편성을 갖는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그래서 유럽과 미국의 대학을 두루 전전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 연안의 1번국도에서 태평양 건너의 한국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던 것이 대학 입학 20년 후였고 그로부터 또 20년이 지난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제는 물리적으로 경계를 넘는 직접적인 체험만이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이 아님을 안다. 당연히 보편의 기준은 서양이 아니듯 동양도 아니다. 어떤 보편도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지역과 지역의 대화 속에서 보편은 발견되고 합의되는 것이다. 다만 유럽과 미국의 대학을 직접 체험한 것이 학부생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고 네가 가진 것을 긍정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해준다.
올해 초 많은 사람이 감동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도 그의 삶이 시대의 제약과 지정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됨의 존엄함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영토의 위치나 크기 같은 움직일 수 없는 변수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불쾌한 지정학의 귀환 시대를 비웃듯이 그는 평생 진주라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은 중졸의 한약사로서 시대와 이념, 경계를 불문하고 모두가 공감하고 존경할 만한 수준의 보편적 사유와 실천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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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권력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지역 언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진주신문을 후원하고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이라는 설립취지문을 1923년에 내세웠던 형평사운동의 기념사업을 챙긴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말하자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라고 격려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쫓기던 학생에게 그 길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포용한다. "당신은 언제든지 이곳에서 나갈 수 있지만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라던 이글스의 가사는 틀렸다. 그는 떠나지 않고도 벗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