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 아닌데?" 탄소 배출 역발상으로 돈 벌 기회 잡는다

머니투데이 최민경 기자, 세종=김훈남 기자 2023.02.0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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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탄소국경세가 온다(下)

"미리 준비하면 돈 번다"…'탄소배출권=기회' 기업의 역발상
"위기가 아닌데?" 탄소 배출 역발상으로 돈 벌 기회 잡는다


탄소 배출 비용이 기업의 위기요인으로 떠올랐지만 이를 기회로 보고 투자 전략에 반영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철강업계 다음으로 탄소 배출량이 많은 석유화학업계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대상 품목에 포함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자체적으로 내부 탄소 배출량에 비용을 산정하는 '내부 탄소 가격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내부 탄소 가격제는 사업장에서 배출되는 기업 내 직간접배출량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래 탄소 가격 변화를 반영해 자체적으로 내부 탄소 가격을 설정하고, 이를 투자 안건 심의 시 적용한다. 기존엔 투자 안건을 평가할 때 현재의 경제적 가치에 중점을 뒀다면, 내부 탄소 가격제는 미래 탄소 비용까지 반영한 종합적인 관점에서 투자 경제성을 검토한다.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는 투자는 '가치'로, 증가시키는 투자에는 '비용'으로 반영하는 식이다. 신규 사업을 추진할 때 탄소 배출이 많은 사업은 배제하고 저탄소 사업을 확대해 탄소배출권거래제(ETS) 시장에 대응하고 탄소를 더 적극적으로 감축할 수 있다.



'넷 제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말부터 내부 탄소 가격제를 투자 안건 심의에 적용하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탄소 배출권 가격을 유가, 환율처럼 경영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지표에 포함해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다양한 글로벌 전문 기관이 예측한 미래 탄소 가격 시나리오를 고려해 내부 탄소 가격을 설정했다. 유럽연합(EU)·미국·한국 등 글로벌 사업장이 들어선 주요 권역별 가격에 따라 2025년 tCO₂(이산화탄소톤)당 40~95달러, 2027년 tCO₂당 60~105달러, 중·장기 가격은 2030년 tCO₂당 120달러, 2040년 tCO₂당 200달러로 증가하는 식이다. 비용을 높게 잡았기 때문에 탄소배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투자만 가능하다.

SK이노베이션과 산하 8개 사업자회사가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는데, SK그룹 차원에서 벤치마킹을 시도하고 있어 확산될 수 있다. SK그룹은 2021년 6월 아시아 민간기업 최초로 탄소감축 방법론과 탄소 감축량을 인증하는 탄소감축인증센터를 설립했다. 지난해 10월까지 SK 관계사의 저전력 반도체, 연비개선 윤활유 등 16건 방법론 및 74만톤의 감축 실적을 인증했다. 조환성 SK이노베이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추진담당 PL은 "SK이노베이션은 탄소배출이 많은 사업은 결국 퇴출되는 세상이 올 거라 보고 넷 제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바꾸려고 한다"며 "경영진들은 탄소배출권 관련 정책이 강화되는 상황을 위험이 아니라 기회로 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LG화학도 내부 탄소 가격제를 시범 도입 중이며 연내 공식 도입한다. 새로운 사업 투자 시 활용할 수 있는 내부 심사 프로세스 가이드를 마련해 전사적으로 확대 적용할 예정이다.

소비재 기업도 나섰다. KT&G는 지난해 3월부터 내부 탄소 가격제를 도입한 후 투자 결정에 활용하고 있다. 현재 제조본부 설비 투자(CAPEX)에 시범 적용 중이고 향후 신성장 투자 등 경영 전반으로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CJ제일제당도 해외 바이오 사업장에 내부 탄소세를 도입하고 올해 전사 확대 적용을 논의 중이다.

민간에서 자발적 탄소배출권 시장(VCM)을 조성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VCM은 민간 기관이 인증한 탄소배출권이 거래되는 민간 주도 탄소시장이다. 이 시장이 활성화되면 탄소감축 의무가 없는 기업이나 기관도 자발적으로 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다보스 포럼에선 2030년까지 자발적 탄소배출권 시장이 약 26억톤 수준으로, 세계 탄소배출량의 7~8% 수준까지 커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SK그룹은 최근 VCM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 국부펀드인 무바달라와 아시아 VCM을 구축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SK그룹 관계자는 "탄소배출권 시장이 성립되려면 공통의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탄소감축인증 방법론 등 다양한 부분에서 표준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구체화되면 경제적 실익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9개월' 정부, CBAM 대응책에 속도…탄소시장 정착 돕는다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이 지난해 12월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EU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대응현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무총리실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이 지난해 12월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EU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대응현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무총리실
유럽연합(EU)이 오는 10월 시행하는 CBAM(탄소국경제도·수출 제품에 제품생산 시 발생한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제도)에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인 철강이 포함되면서 업계와 함께 정부의 대응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정부는 탄소비용(배출권) 구매의무가 생기기 전까지 향후 2년여 동안 기업의 신고의무를 돕는 한편 국내외 탄소배출 측정 및 보고, 검증 시장 정착 등을 지원한다.

3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산업부는 지난 2일 오후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대(對) EU 통상현안 대책단' 및 '범부처 EU CBAM 대응 TF(태스크포스)' 회의를 개최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EU의 CBAM 전환 기간 시행에 앞서 선제적 대응을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EU가 지난해 12월 CBAM 시행을 놓고 집행위원회·각료이사회·유럽의회 간 3자합의를 도출하자, 정부는 철강 등 수출기업의 영향을 중심으로 대응 방안 및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정부는 EU 측에 CBAM 조항이 WTO(세계무역기구)나 FTA(자유무역협정) 등 국제 통상규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마련돼야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한편 국내 탄소배출량 검증인력과 기관 등 탄소배출 관련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우리 수출 품목 중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철강 산업 영향에 대비해 산업부는 이달 10일 '철강산업 탄소규제 국내대응 작업반'을 꾸렸다.

산업부 산업정책실이 주도한 이번 작업반에는 철강협회와 무역협회, 포스코, 현대제철 등 업계와 학계가 참여해 CBAM과 미국-EU간 GSSA(지속가능한 철강 및 알루미늄에 관한 글로벌 협정) 등이 우리 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대책반에 참여한 업계는 EU CBAM 대응을 위해 탄소배출 검·인증,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등 정책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정부는 전기로 효율향상, 수소환원제철 기초 설계 등 기술개발에 총 2097억원을 지원하고 탄소배출량 검·인증기관 확대, 대응가이드북 배포, 실무자교육 등을 통해 국내 배출권 MRV(측정·보고·검증) 시장 조기정착과 철강업계의 탄소규제 대응을 지원할 방침이다.

환경 규제 주무부처인 환경부도 CBAM 세부절차가 확정되는 대로 품목별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검증·보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지침)을 마련할 예정이다. 기업을 상대로는 맞춤형 제도 안내와 헬프데스크 운영 등을 통해 유럽의 입법 동향을 공유하고 산업현장의 의견을 수렴할 방침이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 역시 지난13일 업계 간담회를 열고 "우리 기업이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활용하도록 다방면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아울러 국내와 EU 기관의 온실가스 검증을 상호인정하는 방안과 함께 국내 거래시장에서 구매한 탄소배출권의 인정 등 환경 주무부처간 협의도 이어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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