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첫 시민회관은 '경성부민관'이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덕안궁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시민회관으로서 대강당(1800석), 중강당, 소강당과 전시장 등을 갖춘 다목적 회관이었다. 부민관은 공연에도 사용됐으나 일제 말기에는 전쟁 참가를 독려하기 위한 정치집회에 자주 사용됐다. 특히 1945년 7월에는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폭탄으로 연단을 폭파해 대회를 저지했다. 이를 기념해 건물 앞에 '부민관폭파의거터' 표석이 설치돼 있다. 광복 후 1950년에는 초대 국립극장으로, 1954년 국회의사당으로, 1975년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1991년부터 현 서울시 의사당으로 사용된다.
세 번째 서울시민회관은 '서울시민회관'이었다. 1961년 11월 광화문에 완공된 이 시민회관은 원래 '우남회관'으로 계획됐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다른 나라에 손색없는 규모의 공회당을 지어 자신의 호 '우남'을 명명함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고자 한 듯하다. 우남회관은 제4대 대통령 취임식에 사용될 예정이라고 보도됐으나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면서 완공 시에는 '서울시민회관'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이 회관은 개관 11년 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972년 12월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기념 10대가수 청백전 공연이 끝날 무렵 전기과열로 인한 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해 3003석의 대강당이 전소됐다. 이 화재는 1971년의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함께 서울시 3대 화재사건에 속하게 된다.
21세기에 이르러 각 도시의 시민회관은 집회 및 행사보다 공연예술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첫머리에서 언급한 각 지역 시민회관의 상당수는 이미 이름을 바꾸고 리모델링해 새롭게 출발했다. 세종문화회관도 변화를 꾀한다. 문화예술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콘서트홀을 추가하고 대극장은 그 규모를 줄일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등포구에 제2세종문화회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미래의 세종문화회관은 랜드마크가 아닌 공연에 최적화한 극장을 지향해 시민에게 사랑받는 서울시민회관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