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통서 3년 만에 꺼낸…14개월 아기의 장례식[남기자의 체헐리즘]](https://thumb.mt.co.kr/06/2023/01/2023012801240475749_18.jpg/dims/optimize/)
하얀 천으로 곱게 싸인 소담한 유골 상자를 받아든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이하 대아협) 대표의 눈물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울음을 참고 본분에 맞게 기록하려 했건만, 삽시간에 시야가 무언가로 가득 차 일렁거렸다. 설 연휴 전날이었던 20일 저녁 6시, 강원도 철원의 목련 메모리얼파크.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마친 14개월 아기가, 이제 막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도착한 터였다.

산 날을 다 모아봐야 고작 14개월. 싸늘하게 죽은 뒤 김치통 안에 있었던 시간이 3년. 숨 쉰 날보다 김치통에 담겨 바스라진 날이 더 긴, 말도 안 되는 슬픈 삶. 시신 유기 혐의로 비정한 부모는 감옥에 갇혔고, 친족은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숨진 아기를 거두길 포기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다 있었으나, 아이는 하마터면 '무연고자'로 제대로 된 장례도, 추모도 없이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질 뻔했다.

아이가 죽기 일주일 전 열이 나고 구토를 하며 아팠지만, 병원에 안 가고 방치한 혐의. 최씨를 면회하겠다며 70여 차례 외출해 아이를 방임한 혐의. 친모 서씨는 그렇게 아동학대치사 및 사체 은닉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최씨도 사체 은닉과 사회보장급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거기에 더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는 아이를 '수목장(뼛가루를 나무 아래에 묻는 장례 방식)'으로 안치해주기로 했다. 이수진 대아협 대리가 우연히 '그알' 영상을 보고 공혜정 대표에게 제안했다. 대표가 전기세도 아껴가며 학대 피해 아동을 돕는 걸 잘 알기에, 말할지 말지 꽤 오래 고심했단다. 걱정이 무색하게 공 대표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화장하면 유택 동산의 커다란 단지에 모아놓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누구 뼈인지도 모르게 되는 건데…그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수목장을 왜 해주고 싶었냐는 물음에, 공 대표는 이리 답했다. 예전에 인천서 계부에게 학대당해 죽었던 호영이도 화장한 뒤 유택동산에 갔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더 아팠다고.
뼈만 남아 수의도 못 입히고…분홍 꼬까옷을 얹었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만나러 가는 설 연휴 전날이었다. 마지막 길 쓸쓸하지 말라고, 대아협이 새벽 5시 30분부터 일찌감치 병원을 찾았다. 공 대표도, 이 대리도, 회원들도 왔다. 처음 보는 아이를 위해 누구는 식당 문을, 또 다른 누구는 미용하는 가게를 닫고 왔다. 다들 마음은 같았다. 화나고 애달프고 속상하고 아픈 마음이었다. 마지막만큼은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라고. 어떻게든 곁을 지켜주고 싶은 거였다.


꼬까옷도 입진 못했다. 그 위에 살포시 덮어줄 뿐이었다. 그 말에 또 어디선가 울음이 터졌다. 관이 너무 작다고, 사과 상자만큼 작단 말에 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자주 울지언정, 아이 엄마와 아빠를 자처한 이들은 그 자릴 꽉 채우며 지켰다. 추모하고 명복을 빌고 좋은 곳에 가라고 절을 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다.
햇볕이 가득 드는, 포근한 이웃이 있는, 나무 아래로 자리를 고르고

공 대표와, 이 대리와, 대아협 회원들과 강원도 철원 수목장 장소로 갔다. 명절 시작이라 차가 막혀 늦게 도착할까 걱정돼 서둘러야 했다. 도착해선 수목장 관계자와 함께 자리를 미리 보러 다녔다. 400만 원 대의 동그란 소나무 자리부터 가봤다. 거기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기 위가 햇볕이 더 잘 들어올 것 같아요"란 말에 그쪽으로 이동했다.


내려와 수목장 관계자와 계약서를 썼다. 공 대표는 가격을 조금이나마 깎기 위해 말을 보태어보다가, 조금 더 기를 써보기도 했다. 그 역시 후원금을 학대 피해 아동들에게 더 쓰고 싶은 거였다. 그러다 "아이가 영원히 묻힐 자리인데, 그걸로 이렇게 흥정하고 싶진 않았는데…"라며 "그냥 그 가격에 해달라"고 일순간 눈물을 쏟았다. 함께 있던 회원들도 다 같이 울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울음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가볍고 작고 따뜻했던 아이를…마지막으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무 앞에 비석을 하기로 정하고, 거기에 쓸 문구를 각자 한 문장씩 적었다.
'하늘에서는 행복하게 뛰어놀기를.'
'사랑해, 편히 쉬어.'
'영원히 기억할게.'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서울에서 검은색 봉고차가 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제 준비를 다 마친 아이가 왔다. 여섯 사람이 정해둔 곳으로 차를 타고 향했다. 수목장할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하얗게 싸인 작은 나무 상자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공 대표가 조심스레 천을 풀었다. 상자를 여니 한지에 화장한 유골이 싸여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너무 가벼워요", "아우 세상에, 어떡해, 이거밖에 없어"라고 저마다 토해내듯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리 고운 흙을 골라 위에 세 번씩 곱게 덮어주는 걸 끝으로, 아이는 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좋은 데로 잘 가라", "외롭지 말아라, 아가"하고 자꾸 뒤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도 꽤 길어졌다. 꽃을 심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섰다. 발걸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올 때보다는 확실히 그랬다.
아동학대로 숨지는 아이, 한 해 40명…장례 '사각지대'

이번엔 아이 장례가 어떻게 지원된 건지 살펴보았다. 의정부지검 관계자는 "영아가 병원에 약 70일 머물며 발생한 장례비는 800만원 정도인데, 친조모가 넉넉하지 않아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이례적으로, 먼저 장례비 지원을 했다"고 설명했다. 원래도 범죄 피해자 지원 시스템으로 장례비 지원은 되지만, 통상은 사후 지원이 원칙이다. 다만 안타까운 사건인 걸 감안해, 내부 회의를 거쳐 의정부지검서 지원한 사례란다.
![김치통서 3년 만에 꺼낸…14개월 아기의 장례식[남기자의 체헐리즘]](https://thumb.mt.co.kr/06/2023/01/2023012801240475749_3.jpg/dims/optimize/)
만약, 아이가 검찰의 범죄피해자 장례 지원을 못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 시신이 발견된 지역인, 평택시에 물어보았다. 평택시 복지과 관계자는 "유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무연고 처리를 하고, 화장해서 뿌리게 돼 있다"고 했다. 연고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찾기 어렵거나,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통상 지자체가 무연고자 장례를 치르게 돼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지자체별로 무연고자 장례를 치러주는 조례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 통계를 보면, 전국 226개 지자체 중 113개(50%)가 공영장례 조례가 없다. 예컨대 학대 피해 아동이 어느 지역에서 사망했느냐에 따라, 장례를 해줄 수도 있고, 장례 없이 화장만 할 수도 있는 거다. 서울시 공영장례를 주관하는 '나눔과나눔'의 김민석 팀장은 "공영장례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제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장례 없이 떠나고, 유족도 급히 처리하기 바빠…전문가 "지자체가 장례 치르고, 추후 청구해야"

장례를 치르더라도, 주체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 폭행 등 학대와 방임으로 숨진 두 살배기 민영이는 그냥 화장될 뻔하다가, 시민 단체 덕분에 가까스로 빈소가 차려졌다. 경기도서 부친 폭행으로 숨진 한 살 아이는,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아동학대 사건 특성상, 아이가 증거인 경우가 많아 장례 절차 없이 빨리 치워버리려는 게 원인으로 꼽힌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의심스런 아동 사망시 바로 화장하는 건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미국에선 아동학대 사망 사례 조사부터 진행한다"고 조언했다.
공혜정 대아협 대표는 "피해 아동이 대부분 장례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며 "보통은 남은 유가족들이 후딱 화장해버리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찰이나 검찰이 아니라, 지자체가 장례 주체가 돼야 한다"며 "먼저 망자를 모시고, 그러고 난 뒤 부모에게 구상권 청구를 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수목장을 다 치르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바깥이 어두컴컴해졌다. 그곳 식당 할머님께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많이 먹어야 아이가 좋은 곳에 간다며, 다들 묵묵히 한 그릇씩을 더 비워내었다. 얼큰하고 개운한 국물을 뜨고 마시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그제야 다들 설 귀성길 걱정이었다. 경남 창원이 고향인 공 대표는 "내일 아침에 도착하겠어"라며 웃고, 충남 논산이 친정이라던 이 대리는 "바로 갈지 어떨지 걱정"이라고 했다. 두 아이 엄마인 대아협 회원도 집에 갈 채비를 마쳤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공 대표는 고향에 가는데 14시간 걸렸단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아이의 존엄성을 지켜줬단 생각에, 감사했다고.
밥을 다 먹고 대아협 회원이 밥값을 두 배로 치르려 했다. 늦은 시간에 챙겨준 인심이 고마워서였다. 식당 할머님이 한사코 거절하려 했으나, 넉넉히 주려는 이의 마음도 만만찮았다. 새끼 길고양이 여럿을 돌보는 할머님이니, 사룟값이라도 하시라고. 이유를 더 붙이며 겨우 김치찌개값을 치렀다. 헛헛한 마음을 끝내 온기로 가득하게 해주던 좋은 이들이었다.
식당을 나가려는데 할머님께서 이리 말했다.
"갈 때 계좌번호 좀 적어놓고 가유. 좋은 일 하시는데 조금 보태고 싶네유."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남몰래 눈물짓고, 더 나아가 이름도 모를 아이들을 위해 힘을 보태려는 선하디 선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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