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SMIC 정면에서 중국과 각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 사진 = 바이두
중국의 한 반도체 기업이 최근 공들여 오던 한국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인수 거래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했다. 기술 이전과 고용, 설비 등을 포함해 최대 수천억원이 오가는 대형 거래였다. 하지만 부담을 느낀 한국 기업이 방향을 선회하면서 세부 조건에서 합의에 실패했다. 중국측 관계자는 "자세한 무산 사유는 공개할 수 없으나 한국이 중국 기업의 인수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며 "미국의 제재와 정부의 태도 등이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했다.
미국·독일서 거절당한 중국발 인수, 한국行 선택한 까닭은
/사진 = 윤선정 디자인기자
중국 반도체가 한국 기업들의 인수에 속도를 내는 것은 미국의 대중 제재로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중국의 반도체 생산기업에 장비 판매를 금지한 직후부터다. 관영 신화통신은 "미국의 수출통제 남용으로 중국은 물론 미국을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라며 "중국의 정당한 권익과 반도체 시장을 위험으로 이끌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현지 업계는 인건비 상승과 반도체 업황 악화로 성장세가 주춤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반전을 서두르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분위기다. 중국 2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중 하나인 화훙반도체의 매출총이익률은 지난해 큰 폭으로 급감해 업계 평균 수준인 24.41%를 밑돌았다. 현지 업계 관계자는 "외국 기업들의 투자·진출이 줄면서 확실히 반도체 부문이 위축됐다"라며 "해외 기술을 확보해 총력전에 나서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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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 반도체의 해외 기술 확보에는 제동이 걸렸다. 각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개입한 탓이다. 지난해 11월 중국 사이그룹의 자회사 실렉스는 독일 반도체 기업 엘모스를 인수하려다 독일 정부로부터 제지당했다. 같은 달 영국 정부는 중국 기업 넥스페리아에게 반도체기업 NWF의 지분 매각 명령을 내렸다. 대만 폭스콘은 중국 칭화유니의 지분 8.23%를 취득했다가 대만 정부에게서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 기업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반도체 기술력을 갖췄으면서도 다른 국가에 비해 보안 체계가 약한 한국기업을 기술 유출과 인수의 주 타겟으로 삼는다. 중국의 대기업들이 '쩐주'로 나서는 만큼 타 국가보다 자금력이 우위에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중국에서 제시하는 금액은 장비나 설비, 기술 모두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라며 "자금이 부족한 국내 기업은 유혹에 시달리기 쉽다"라고 말했다.
시도가 워낙 은밀해 제대로 된 현황 파악도 어렵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중국 기업이 한국에서 합작투자를 명목으로 기술과 제품을 중국으로 가져가려는 활동을 하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실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인을 못하고 있다"라며 "중국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는 한국의 기술을 노린 제의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벌 없는 한국, 중국 먹잇감 됐다…"지금 바로 대책 세워야 한다"
화훙반도체. / 사진 = 화훙반도체 제공
27일부터 네덜란드·일본 등 주요 반도체 생산국이 미국의 대중 제재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절박해진 중국의 '기술 빼오기'는 더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학기술협회는 지난해 대중 제재 직후 보고서를 통해 "인수합병을 수행하는 기업이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점유할 수 있다"며 "중국 반도체 기업은 대규모 통합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 내부 인수합병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영준 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과 교수는 "한국 반도체 기업이나 전현직 임직원들이 중국에서 거액을 제시했을 때 현실적으로 이를 거부하기는 무척 어렵다"라며 "중소형 협력사를 대상으로 한 기술유출 방지 대책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