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가 우릴 소시오패스로 만든 숨겨진 이유[PADO]

머니투데이 김수빈 에디팅 디렉터 2023.01.29 08:00
글자크기

[PADO]

편집자주 최근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실적이 급락하면서 SNS의 시대가 몰락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됐기 때문에 아직은 설익은 관측입니다만 사회적, 윤리적 측면에서 SNS의 폐해가 너무 크다는 지적은 꾸준히 나왔습니다. 매체 철학자이자 게임 디자이너인 이언 보고스트는 SNS의 발달 과정에서 어떻게 이런 해악이 발생했는지를 짚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문예지 애틀랜틱(The Atlantic) 2022년 11월호에 실린 글을 요약 소개합니다.

페이스북페이스북


SNS의 시대는 끝났다. 페이스북은 쇠락하고 있고 트위터는 혼돈 그 자체다. 마크 주커버그의 제국은 시가총액 수천억 달러가 증발했고 1만1000명을 해고했다. 페이스북의 광고 사업은 위기고 '메타버스'의 꿈은 아무런 기약도 없다.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자 광고주들은 서둘러 광고를 빼기 시작했고 트위터 유명인사들은 트위터를 떠나기 (적어도 떠나겠다는 트윗을 올리기) 시작했다. SNS의 시대가 조만간 끝날 거란 이야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마치 풍랑을 만나 낯선 무인도에 떠내려온 것 같은 상황이다. 한편으론 우릴 여태껏 표류하게 만든 최초의 조난 사고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돌이켜 보기에 지금이 적기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린 마치 SNS가 처음부터 우리 삶의 일부였던 양 사용했지만 SNS는 결코 일, 놀이,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우리가 SNS를 사용하는 방식은 기이한 변이를 통해 발전했는데 워낙 미묘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당시에는 무엇이 변했는지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변화가 시작된 건 대략 20년 전이었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의 사용이 용이해지면서 사람들은 이를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셜 네트워킹'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친구와 정말로 친교를 맺는 대신 친구를 '수집'하는 것 같은) 이는 그 뒤에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약과였다. 2000년대 후반이 되자 지금의 SNS와 같은 '소셜 미디어'가 자리를 잡았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변화였지만 그 영향은 엄청났다. '소셜 소프트웨어'는 기존 인간관계를 적절히 사용(생일 파티 준비 같은 오프라인 생활을 위한 용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 사람 사이의 연결망을 일종의 방송 채널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자 수십억의 사람들이 일순간에 스스로를 연예인, 전문가, 또는 유행의 선구자로 포장하게 됐다.



이젠 'SNS'와 '소셜 미디어'를 같은 의미처럼 번갈아 사용하지만 원래 그런 건 아니다. SNS('네트워크')란 명함첩, 세일즈 대상 고객들의 명단, 어쩌면 영혼의 짝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담긴 졸업앨범처럼 일종의 수동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미디어')는 (과도하게) 능동적이다. 필요할 때까지 그대로 두는 대신 쉴새없이 각각의 관계망으로부터 콘텐츠를 쏟아낸다.

틱톡(TikTok)에서 본래 아는 사람들이나 특정한 사용자를 팔로우하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알고리즘이 뽑아올린 영상들의 무한한 흐름을 따라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여전히 특정 기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용자들과 연결이 되어야 하지만 이제 '연결'은 소셜 미디어의 주된 기능이 아니다. 이렇게 비교할 수 있다. 소셜 네트워킹 시대에는 사람 사이의 연결이 본질적이었고 이것이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로 연결됐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그저 콘텐츠가 계속 흐를 수 있게 만들 정도의 얄팍하고 손쉬운 연결만 있으면 된다.

소셜 네트워크가 소셜 미디어로 진화하면서 기회와 함께 재앙도 찾아왔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 서비스들의 사용자 참여도가 급증하자 데이터 기반 광고를 팔아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 타인의 관심을 기반으로한 콘텐츠 경제가 생겨난 덕분이었다.


벤처 투자자의 기대와 월스트리트의 요구로 구글, 페이스북을 비롯한 IT 기업들은 더 큰 규모에 중독됐다. 네트워크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손쉽고 저렴하게 도달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사실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트위터에서 명성 자본을 획득하는 기자, 인스타그램에서 기업 협찬을 구하는 20대 청년, 유튜브에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호소하는 반체제 운동가, 페이스북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모반가, 온리팬즈(OnlyFans)에서 자신의 포르노를 파는 사람들, 링크드인에서 조언을 파는 자칭 '구루(guru)'들이 바로 그렇게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사람들이다. 소셜 미디어는 저비용 고수익으로 대규모의 관객을 확보할 '잠재성'을 보여줬는데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자신에게도 그만큼의 관객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것이 바로 소셜 미디어라는 동전의 뒷면이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모두가 접근 가능하다면 관객 또한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글을 쓴 작가도, 프로젝트를 발표한 유명인도,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예쁜 여성도, 익명의 악플러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이유로든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네트워크 연결이 작동하면 모든 연결이 활보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끔찍한 발상이었다. 인간은 원래 이 정도로 서로에게 말을 걸도록 돼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해서도 안 됐고, 그런 표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돼서도 안 됐다. 모든 생각이나 관념에 대해 댓글을 달거나 응수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구입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리뷰를 남겨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부터 모든 트윗과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좋아요'나 댓글, 팔로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소셜 미디어는 인간의 사회성에 소시오패스적이고 정신착란적인 면을 빚어놓았다. 페이스북처럼 소시오패스가 디자인 철학인 IT 대기업에서 소셜 미디어의 모델이 탄생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변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이미 우린 우리의 삶을 소셜 미디어의 쾌락과 고통에 적응시켰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는 건 마치 단체로 담배를 끊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20세기 미국에서 사람들이 금연을 하게 되기까진 수십 년에 걸친 규제와 PR 캠페인, 흡연에 대한 공개적 비난, 미적 기준의 변화가 필요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흡연이 불쾌하거나 멋지지 않아 보인다거나 심지어 흡연으로 우리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흡연을 압살하도록 강요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소셜 미디어에 대해서도 그런 과정이 시작돼야 한다.

적절히 사용하기만 한다면 컴퓨터를 사용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발상 자체는 결코 끔찍한 게 아니다 (물론 서로를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위험은 남는다). 문제는 이걸 매순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하나의 열망, 하나의 집착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부터 소셜 미디어가 약속한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소셜 미디어가 마치 파우스트의 계약처럼 큰 댓가를 치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20년이나 걸렸다. 언젠가 결국은 소셜 미디어의 그물이 모두 성글어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글은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의 'SNS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를 요약한 것입니다.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독자 여러분이 급변하는 세상의 파도에 올라타도록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