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환상

머니투데이 김동규 (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2023.01.2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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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발틱 3국의 한 항구에서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4박15일 대륙횡단 철도여행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가 얼마나 넓은지, 블라디보스토크가 얼마나 가까운지 체험하고 싶었다. 한 번으로 족한 경험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역시 장거리여행에서 철도는 항공기를 이길 수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로망이었다. 춘원 이광수의 낭만적 '유정'도 시베리아철도와 바이칼호수를 배경으로 한다. 어린 시절 상상력을 자극한 '은하철도 999'도 시베리아철도를 무의식에 깔고 있다. 일본인들의 만주-시베리아 횡단철도 경험이 묻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낭만주의는 눈앞의 현실이 보기 싫어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는 태도다. 이광수는 식민지 조선이 보기 싫어 만주 너머 시베리아를 꿈꾸듯 바라봤고 그 이전 단재 신채호는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보기 싫어 1500년의 긴 시간 너머 만주 벌판을 말 달리던 광개토왕과 고구려를 상상했다. 사라진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일수록 낭만적 힘을 가지고 절망에 빠진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삼국을 실제 통일한 신라, 빠르고 값싼 항공편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낭만이 못 된다. 사라진 고구려와 느린 철도가 낭만적이다.



우리에겐 오랫동안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북한과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까지 여행한다는 로망이 있었다. 이 역시 현실적이지 않기에 더더욱 낭만적이었다. 식민지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유정'의 이광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답답한 남북관계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저 너머 상상 속 시베리아로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14박15일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했듯 철도는 속도에서는 항공기를, 물류비용에서는 선박을 이기지 못한다. 철도는 선박보다 물류비용이 5배 이상 비싸다고 한다. 게다가 여러 국경을 경유해야 하는 철도와 달리 선박은 국경을 거칠 필요 없이 공해를 통해 목적지로 '도어 투 도어' 직행한다. 철도와 달리 정치적 이유나 분쟁 등의 이유로 길이 막힐 위험도 거의 없다. 어느 나라든 주요 상공업 도시는 바닷가에 있다. 중국의 상하이, 선전이 그렇고 미국의 뉴욕, 로스앤젤레스가 그렇고 우리의 부산, 울산이 그렇다. 그만큼 바다는 상업과 공업에 친화적이다. 미국이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발돋움한 19세기 말 앨프리드 머핸이라는 전략가가 '해양력'(sea pow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한 나라의 힘은 바다에서 나온다고 했다. 해양력, 즉 '바다의 힘'이란 바다는 독특한 힘을 가져서 그 힘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한국인들은 원래는 바다와 가까웠는데 명청대 중화제국 질서 안에 들어간 후 제국이 쳐놓은 쇄국의 담장에 갇혀 바다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을 열고 러시아 시베리아를 지나 벨라루스-폴란드-독일을 거쳐 15박16일을 달려야 파리에 도착하는 '대륙횡단 철도'라는 환상과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한한 힘을 품고 그 힘을 나눠주는 바다로 가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린 바다에서 흥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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