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란 대국에서 흑돌을 양보받고 태어난 남자가 있다. 이렇게나 좋은 흑돌을 그냥 쥔 것도 아닌, 양보까지 받고 태어난 삶이라니. 말 그대로 날 때부터 손엔 금수저를 들고 발엔 꽃신을 신었다. 당연하게도 남들보다 쉽고, 유리한 삶을 부여받아 세상을 제 발 아래 두고 산다. 지금까지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아군을 자처한다. 마치 바둑돌처럼 피아가 확실한 삶은 완벽하다. 남자는 제가 쥔 흑돌을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완벽한 삶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줄 그것을, 제가 그래왔던 것처럼 제 딸에게도 언제나 쉽고 유리한, 탄탄대로를 보장해 줄 그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흔들리는 때가 찾아오고야 만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바둑을 사랑하는 남자가 자주 찾는 기원에서 안개처럼 흐린 여자를 마주한 순간이다. 바둑판처럼 선명하던 그의 삶에 어느새 자욱하게 스민 여자는 빼어난 실력으로 그의 관심을 유발하고, 과묵하던 남자를 답 하나 끌어내지 못하는 질문을 쉼 없이 던지도록 만든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자와 시작한 대국에서 백을 쥐고 있음을 깨달은 남자는 “나한테 바둑을 가르쳐주신 변호사님이 계신데, 자넨 태어나면서 흑돌을 양보받은 삶이라고. 그래서 난 늘 남들보다 유리하고 쉬웠는데 지금 이 대국은 너무 난전이네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정성일은 ‘더 글로리’가 공개된 이후 많은 시청자를 열광시킨 주인공이다. 공개 전 스타 제작진과 송혜교 이도현의 로맨스에 쏠렸던 시청자의 관심은 작품 공개 이후 정성일이 연기한 하도영의 이른바 ‘젠틀 섹시’ ‘섹시한 개XX’ 모먼트에 푹 빠졌다는 반응이 주를 이룰 정도다. 특히 기원에서 하도영과 문동은이 재회하는 장면에선 두 사람이 잠시간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서로를 향하는 눈빛과 섬세한 표정이 마치 영화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만들기도.(이에 그를 향해 ‘한국의 양조위’라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제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긴 시간 바둑을 배우고 하도영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문동은과 그의 철저한 덫에 걸린 하도영의 관계는 서로에게 독이 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탓에 ‘사약 케미’라 불리기도 한다.
사실 캐릭터로만 보자면 겉으로는 반듯하고 신사적인 하도영은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을 기저에 품고 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쉬운 문제”라는 대사나, 비 오는 날 제게 들어온 와인을 건네주기 위해 잠시 우산 좀 들어달라는 운전기사를 대하는 태도 등에서 그의 불편한 속내는 드러난다. 또 박연진과는 부부이고, 아이가 있는 아빠이기에 문동은에게 끌리는 마음은 시청자가 거부감을 느끼기 충분한 설정이다. 그럼에도 시청자가 그에게 열광하는 건 하도영을 섹시하고 젠틀한 인물로 완성시킨 정성일의 연기에 있다.

‘더 글로리’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는 “정성일이 인생이 가장 크게 하락하는 인물인 도영을 잘 표현했다. 차가울 땐 차갑고, 웃을 땐 나이스 한 표현을 정말 잘해줬다. 특히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어떻게 써도 명대사처럼 들린다. 특별히 감사드린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했다. 유명한 작가의 좋은 대본, 유명한 연출자의 빼어난 연출, 기대작이 하루아침에 그에게 굴러들어 온 것이 아니다. 여러 방면에서 켜켜이 쌓아온 그의 진가가 ‘더 글로리’를 만나 제대로 빛을 발한 것이다. ‘더 글로리’는 여러모로 배우 정성일에게 ‘더 글로리’한 작품으로 기억될 테지만, 결국 지금의 자리를 만든 건 정성일의 지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