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시리즈 '카지노' 4화 예고편 캡쳐.
이달 6일 수원지법 204호. '해외로 도피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을 만나 무엇을 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쌍방울 계열사 대표 A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내놓은 대답이다. 김 전 회장이 검찰의 수사를 피해 해외로 건너가 여가를 즐기면서 새로운 사업까지 검토했다는 것이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디즈니플러스의 신작 드라마 '카지노'가 그린 해외도피사범들의 호화생활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김 전 회장은 태국에서 '본명'을 밝히면서 국내 인사에게 전화를 하거나 텔레그램으로 연락을 할 정도로 대담했다.
지난해도 8월까지 379명 해외도주...최대 도피처는 필리핀
죄명으로 보면 사기 혐의 도피범이 1854명으로 전체 범죄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도박 565명(15%), 마약 200명(5%), 폭력(4%), 횡령배임(4%), 성범죄(3%) 순이다. 지난해 1~7월 기준으로 국내에 송환된 해외도피사범은 국가별로 필리핀 56명(27%), 베트남 39명(19%), 중국 36명(17%), 태국 25명(12%), 캄보디아 10명(4%) 등이다. '카지노'에서 그린대로 사기 범죄를 저지르고 달아났다가 필리핀에서 검거돼 송환되는 사례가 가장 흔한 셈이다.
2018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해외로 도주한 범죄자 3781명과 비교해 같은 기간 국내로 송환된 범죄자는 1583명에 그친다. 이 기간으로만 한정해도 2000명이 넘는 범죄자가 도피 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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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으로 출국 기록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나가면 국내에 체류하는 것으로 간주돼 공소시효 정지 규정도 적용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처벌을 피한 사람이 2018년에 이미 1만명을 넘어섰다.
징역형 선고 도피범도…선종구 전 회장 잠적 1년5개월째
대검찰청에 따르면 선 전 회장 같은 자유형 미집행자는 2021년 5340명으로 2017년 4593명, 2018년 4458명, 2019년 4413명, 2020년 4548명, 2020년 4548명에 비해 700~800명 늘었다. 법조계에서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불구속 재판이 늘어난 것도 자유형 미집행자 증가의 원인으로 본다.
선 전 회장은 도피 와중에도 대리인을 내세워 진행 중인 622억원 규모의 증여세 환급 소송으로도 논란이다. 2021년 12월 1심에 이어 지난해 11월 나온 2심 승소 판결이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면 국세청은 선 전 회장이 자녀 명의로 취득했던 하이마트 주식에 부과한 상장차익 증여세 622억원을 고스란히 돌려줘야 할 상황이다. 선 전 회장은 과거 보유했던 더플레이스CC 골프장과 각종 부동산도 모두 매각한 뒤 해외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송환을 앞둔 김성태 전 회장 이상의 호화 도피가 추정되는 대목이다. 지난해 2심 판결 이후 국민적인 공분이 터져나온 이유다.
수사당국이 국세청, 관세청, 금융정보분석원(FIU)과 손잡고 해외 도피사범 검거에 못지 않게 이들의 불법·은닉재산 환수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런 재산은 복잡한 채권 채무 관계로 엮인 경우가 대다수라 환수가 더디고 쉽지 않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씨가 회삿돈 수백억원을 해외로 빼돌렸다가 여권을 위조해 출국한 뒤 21년만인 2019년 검거됐을 때도 불법재산을 환수하는 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불법재산 환수 더 어려워…국가간 공조 구축해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지난해 9월23일 5개월 동안의 추적 끝에 140억 원대 가상자산 해킹 피의자 A씨(40대·남)를 필리핀 현지경찰과 공조해 체포,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강제송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성태 전 회장 검거 과정은 국제 형사 공조의 성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검찰과 경찰 안팎에서 주목받는다. 검찰에서는 수원지검 김 전 회장 수사팀에 투입된 범죄인 인도·형사사법 공조 분야의 전문검사(블루벨트) 인증을 받은 조주연 대검 국제협력담당관(부장검사)이 지난해 12월 초 태국을 방문했다. 이원석 검찰총장도 같은 달 주한 태국대사를 접견하며 김 전 회장 등 해외도피사범 송환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은 태국 현지에 파견한 코리안데스크(한국인 사건 전담 주재원)를 통해 지난해 12월 김 전 회장의 동선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검거에 힘을 보탰다.
검찰 출신 법조계 한 인사는 "국가간 공조 체제가 강화되면 선종구 전 회장이나 권도형 대표 등 거물급 해외도피범을 검거하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라며 "보이스피싱, 마약 등 범죄가 국제화되는 데 맞춰서도 국가간 대응 역량을 키울 기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