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넷플릭스
그러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의 '본투비 악녀' 박연진(임지연)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성악설을 믿게 된다. 주위에서 이와 비슷한 부류의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며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드라마나 뉴스에서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절대 이해불가하고 동정이 허락되지 않는 악의 원형질.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지독한 속물 박연진과 같은 괴물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는 걸 알기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안타까움, 씁쓸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악역을 잘 소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쁜 행동을 잘 연기하고 감정을 잘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과잉과 폭발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잘 알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악행에 서사를 부여하거나 악역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켜서도 안된다. 학교폭력 가해자처럼 실제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은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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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연진은 이러한 본성을 감춰둔 채 생활한다. 이제 어른이 됐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 더 이상 무소불위를 권력을 휘두르던 학창시절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악행에 대해 죄책감이나 반성은 하지 않는다.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서기도 하고 이제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됐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잊고 살았던 문동은(송혜교)이 자신 앞에 나타나고 과거를 문제 삼기 시작하며 연진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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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연진같은 악녀들에겐 참 귀찮은 일일 듯하다. 학창 시절처럼 모든 게 흑과 백이 아니고 성질대로 살 수 없으니. 임지연은 상냥하고 다정한 워킹맘과 본투비 악녀 사이를 능청스럽게 이리저리 오가며 시청자들을 분노 게이지를 올린다. 잘 나가는 기상캐스터, 상냥한 엄마, 다정한 아내를 연기하는 임지연은 구김살 없는 미소로 주변 사람들을 대한다. 반면 자신을 협박하는 동은, 들으라는 듯이 자신을 욕하는 후배에게는 잊을 수 없는 '썩소'로 감정을 드러낸다. 두 가면을 자유자재로 갈아끼우며 복잡미묘한 불안한 감정선을 제대로 형상화하는 임지연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동은의 공세가 시작돼 연진의 악한 본능이 더욱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서 임지연의 연기는 빛을 더욱 발한다. 무리 중 서열 최하위인 명오가 연락이 되지 않자 짜증섞인 말투로 주변 사람을 닦달하고 아빠가 참관수업에 왔다는 딸의 말에 좀처럼 내지 않던 화도 내는 모습은 극에 긴장감을 더욱 배가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운전하다 돌연 차를 세워 담배를 피우다 옷에 담뱃재가 튄 것을 보고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연진이 단죄를 받을 날이 가까워 왔다는 걸 예감하게 하기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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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시청 후 임지연의 연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놀라운 건 이번이 임지연이 처음으로 도전하는 악역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어두운 이미지의 장르물들에 자주 등장했지만 본격적인 '악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지연이 '더 글로리'에서 '대선배' 송혜교에 맞서는 악역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임지연은 이런 우려를 넘어서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증명했다. 데뷔 초반 '연기력 논란'은 완전히 잊게 한 '명품 배우'의 탄생이다.
오는 3월 공개되는 파트2에서는 가해자를 향한 동은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그려질 예정이다. 햇빛 아래에만 있던 연진의 인생에 폭풍우가 몰려올 전망이다. 몰락이 가까워진다는 의미다. 연진은 어떤 방식으로 무너져 내릴지 또 임지연은 박연진의 최후를 어떻게 그려낼지 벌써부터 너무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