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퇴근 후 또 일하러 가는 근로자들...K조선 부활 막는 '52시간'

머니투데이 영암(전남)=김도현 기자 2022.12.09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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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에 갇힌 대한민국]5-끝 ①입주기업 80%가 조선 관련 기업인 전남 영암 대불국가산업단지

편집자주 대한민국 산업현장이 기술혁신과 디지털혁명 등으로 급변하고 있다. 또 일하는 방식과 노동 구조의 변화, 해외 인력 수급, 고령화에 따라 노동시장이 대변혁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주 52시간제'로 정해진 근로시간제도는 여전히 과거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다. 기업들은 이 틀에선 새로운 산업환경에 대응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근로시간제도 개편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머니투데이가 실제 산업현장의 현실을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7일 한 외국인 근로자가 현대삼호중공업 협력사 동신공업에서 근무하는 모습 /사진=김도현 기자7일 한 외국인 근로자가 현대삼호중공업 협력사 동신공업에서 근무하는 모습 /사진=김도현 기자


"사람이 줄어드는 데 유니폼이 팔리겠습니까. 하나 남은 유니폼 회사도 2-3년 전 문을 닫았습니다"



전남 영암에서 만난 한 입주기업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이같이 설명했다. 대불국가산업단지 중심부에 위치했던 마지막 유니폼 회사가 자리했던 자리에는 현재 편의점이 영업하고 있었다.

조선소가 있는 도시에는 유니폼 제작업체가 성업하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푸른 유니폼이 근무복이자 정장이다. 결혼식장은 물론 장례식장에서도 유니폼 차림새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영암 대불산단과 이웃한 목포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삼호중공업을 비롯해 입주기업의 80%가 조선소 또는 조선기자재 업체가 밀집한 대불산단에 유니폼 회사가 사라졌다는 것은 조선 도시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다. 사라진 이유는 간단하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2014년 20만3441명이던 조선업 재직자 수는 지난 7월 말 기준 9만2394명으로 54.5% 감소했다. 생산인력(9만8003명) 유출이 가장 심각했다. 울산·거제 등 다른 조선 메카보다 영암·목포의 유출 규모가 컸을 것으로 업계는 분석한다.

선박 화물창 덮개를 제작·공급하는 주평노 마린텍 대표는 "애초부터 울산·거제보다 인건비가 비쌌다"면서 "배후인구가 가뜩이나 적기 때문에 인력을 모집하기 위해 보다 비싼 값에 직원들을 모집했지만 조선 불황 장기화로 속속 떠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숙식 지원을 약속하면서까지 채용에 나섰지만, 이제는 정말 씨가 말랐다"고 말했다.


대불산단 관계자들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인력 유출을 가속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선박 시장이 급격한 다운사이클에 진입하면서 일감이 부족해지고 조선소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조선소와 협력사 임금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철야·특근 등으로 수익을 올렸던 노동자들은 제한된 근무 시간에 수익이 크게 줄어들었다.

때마침 경기·충청 일대서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속속 조선소를 등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유출 속도가 빨라졌다. 2020년부터 조선 경기가 되살아났고 슈퍼사이클에 진입하면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같이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가 활기를 띠면서 일감이 급증했지만 떠난 노동자들이 되돌아오진 않았다.

업계는 외국인 노동자 확충을 통해 부족한 일손을 채우려 하고 있다. 이미 많은 외국인이 사내·외 협력사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며 정부도 일부 규제를 완화해 연내 2657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순차적으로 입국하기로 결정됐지만, 인력난 해갈은 아직 요원하다.

대불산단 입주사 관계자는 정부의 비자 발급 요건이 완화돼 더 많은 외국인이 입국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주 52시간 근무제를 포함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도 전제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내국인력 유출의 원인이 됐던 주 52시간 근무제가 외국인력을 유치하는 데도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삼호중공업 사외협력사협의회 총무직과 대불산단 입주사 협의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창수 동신공업 대표는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생각이 큰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는 근무 시간 제한 조치가 달가울 리 만무하다"면서 "정부가 추가적인 규제 완화로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 입국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유지되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실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뒤 이곳 산단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도 많이 바뀐 것으로 파악됐다. 근무시간 감소로 줄어든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퇴근 후에는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주말에는 농·어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삯을 받는 게 일상화됐다.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부족한 조선소 바깥의 가욋일감을 확보하는 경쟁이 벌어질 정도라고 전해진다.

목포종합수산시장 인근에서 만난 한 인력사무소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어시장에서 주말에만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났다"면서 "대부분 조선소 등에서 근무하는 이들"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처음에는 조선소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자를 중개 받았지만, 어느새 일상이 되면서 농가와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나름의 커뮤니티를 통해 알바에 나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창수 대표는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한국 조선산업의 진짜 위기는 인구감소"라면서 "노동집약적 산업 특성상 외국인 노동자를 유치하고, 이들이 숙련공으로 성장할 수 있게 정착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들이 봤을 때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란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면서 "기업도 노동자도 거부하는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규제들이 속히 완화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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