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진출 먼저" 엉켜버린 유럽 배터리 자급화...韓 지배력 더 커진다

머니투데이 김도현 기자 2022.12.06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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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볼트가 독일에 추진하던 배터리공장 조감도 /사진=노스볼트 홈페이지노스볼트가 독일에 추진하던 배터리공장 조감도 /사진=노스볼트 홈페이지


원자재 비용 상승으로 유럽 내 신규 생산라인 구축에 어려움을 겪게 된 현지 배터리 기업이 인플레이션 방지법(IRA) 대응을 위해 미국에 먼저 터를 닦겠다고 선언했다. '유럽판 IRA'로 불리는 원자재법 초안도 내년 초 발표될 예정이어서 유럽에서 이미 생산 기반이 탄탄한 K배터리의 지배력이 더 높아질 전망이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유럽 최대 배터리기업 노스볼트(Northvolt)는 독일 하이데(Heide) 배터리 공장 착공을 연기하고, 북미 배터리 투자를 선제적으로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에너지비용 상승으로 유럽 내 물가가 급등해 공장 신설 비용이 과도하게 커졌고, IRA 대응을 위한 고객사 요청에 따라 투자계획 순서가 바뀌게 됐다.



노스볼트는 미국에 진출하는 첫 번째 유럽 배터리 회사다. IRA 발효 직후부터 유럽의 주요 완성차·에너지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행을 선언했지만, 유독 배터리업계만 조용했다. 대다수 현지 배터리 회사들이 자체 생산라인 구축도 완비하지 못한 상태기 때문에 IRA 대응을 고민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현지 1위 노스볼트마저 본격 양산에 돌입한 것은 지난 5월부터다.

이번 결정은 신시장 공략을 위한 전략적 판단보다 비용부담을 낮추기 위한 선택적 투자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제스퍼 위가르트(Jesper Wigart) 노스볼트 대변인은 최근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티브 유럽과의 인터뷰에서 "유럽 내 에너지 가격 부담이 큰 상황에서 북미 대응 이슈가 생겨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아직 수율 정상화를 이루진 못했지만, 노스볼트는 스웨덴에 생산라인을 구축한 상태고, 폭스바겐그룹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투자계획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라면서 "현재 공장을 짓고 있거나, 착공을 준비하는 배터리 회사들의 경우 늘어난 설립비용에 부담이 커 파산을 신청하는 기업이 나올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노스볼트의 투자 선회에 이어 다른 기업들의 배터리 생산 차질이 이어지면, 유럽이 추진하던 자급화 정책도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유럽은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3사 배터리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아, 전기차 시장에서 실익이 동아시아 지역에 과도하게 분배될 것이란 위기의식 아래 자급화 전략을 세웠다.

2019년부터 본격화된 이 프로젝트는 독일·프랑스·스웨덴·폴란드·핀란드·벨기에·이탈리아 등이 주도했다. 독일이 12억5000만유로(약 1조7000억원)로 가장 많은 투자금을 부담했고 프랑스·이탈리아가 각각 9억6000만유로(약 1조3000억원), 5억7000만유로(약 7600억원)를 투자했다. EU 집행부도 32억유로(약 4조4000억원)을 집행했다.


7조원이 넘는 자금이 전기차·배터리 밸류체인 전반에 폭넓게 단행됐다. 2025년부터 생산량을 대대적으로 늘려 2030년 이전까지 한국을 앞서겠단 전략이었으나, 현재 가동하고 있는 자체 배터리 공장은 스웨덴 노스볼트 공장뿐이다. 이 기간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은 투자를 확대해 생산량을 키웠다.

부담 요인은 또 있다. EU가 추진하는 원자재법이다. IRA와 마찬가지로 유럽 내에서 배터리 등을 조달한 전기차에 보조금이 지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유럽 내 배터리 생산의 절대다수는 한국 3사가 맡고 있다. 유럽의 배터리 자체 생산 계획이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내재화에 동참하기로 했던 현지 완성차 회사들도 K배터리 의존도가 커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르노그룹 회장이 최근 한국을 찾아 국내 배터리 회사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속내 역시 원자재법을 의식했던 것"이라면서 "유럽 완성차 회사들의 제안으로 현지 합작사(JV) 논의가 내년부터 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카스파 롤스(Caspar Rawles) 벤치마트미네랄인텔리전스 애널리스트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유럽의 배터리 공장 건설 계획이 무산될 수 있다"면서 "다수의 고객사와 현지 생산설비를 보유한 한국 등 아시아 기업들의 유럽 지배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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