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백년기업

머니투데이 강기택 산업2부장 2022.12.05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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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오너들은 높은 상속·증여세를 의식해 주가를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상속·증여세의 과세표준이 주가여서 주가가 높으면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랫동안'코리아디스카운트'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이 점에 착안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펀드도 종종 나타났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는 고령의 대주주가 보유한 기업의 2~3대 주주가 될 정도의 지분을 사들이는 방식을 취했다. 상속 이후 주가가 기업가치를 반영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행동주의를 표방한 펀드의 성격상 지분을 사두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경영권이 위협받게 될 경우 '주주가치 실현'을 위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응하면 백기사 역할을 하고 거부하면 적대적 인수합병을 하겠다는 전략적 접근을 했다.



일종의 '지분 알박기' 개념이었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증여세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한국의 상속·증여세율은 50%인데, 최대주주 할증까지 하면 60%가 된다. 상속세를 두 번 내면 경영권을 지키기 어렵다. 이런 세제가 존재하는 한 백년기업은 정상적인 가업승계 방법으로 나올 수 없다. 업력 100년 이상인 장수기업이 일본 3만3076곳, 미국 1만9497곳, 독일4947곳, 스웨덴 1만3997곳인 반면 국내는 7곳 밖에 안 되는 데는 이같은 제도적 장벽이 있다.

그러니 가업승계를 위해서는 자식 명의의 기업을 세워 일감을 몰아주는 등 법과 도덕에 반하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기업지배구조의 후진성도 과도한 상속·증여세에서 기인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을 팔아야 한다. 락앤락, 농우바이오, 유니더스 등의 중견기업의 주인이 사모펀드로 바뀌었다. 천문학적인 세금을 내기 위해 주식을 파는 것도 만만치 않다. 대주주는 적대적 M&A에 노출되고 이를 막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세금납부를 위한 매물 부담으로 주가가 빠지면 소액주주들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수익률에 악영향이 간다.



스웨덴 제약회사 아스트라가 대표적 사례다. 창업주 일가는 아스트라 주식을 팔아 상속세를 내야 했는데, 주가가 폭락하면서 상속세가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창업주 가문은 파산했고, 주주들은 손실을 봤다. 결국 아스트라는 영국의 제네카에 헐값에 팔렸다. 이후 기업들의 스웨덴 탈주가 일어났다. 이케아(가구), 테트라팩(우유팩), 등이 본사를 해외로 옮겼다. 경제적 사회적 폐해가 심각해지자 스웨덴은 2005년 여야 합의로 70%였던 상속세를 폐지하고 대신 자본이득세를 부과했다.

사람은 제도에 반응하는 존재다.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행위가 바뀌고 결과가 달라진다. 물려받은 재산의 절반 이상을 국가가 약탈하는 상속·증여세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되 도덕적 해이나 위법을 저지르면 강력 처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광화문]백년기업


상속·증여를 통한 '부의 대물림'을 비판하지만 오너는 기업을 팔아 현금화한 뒤 갖은 절세방법을 써서 자식에게 넘겨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업이 폐업하거나 경영권을 팔면 그 기업의 임직원들은 고용이 불안해지고 '가난의 대물림'에 직면한다. 상속증여세를 통해 소득 재분배나 경제적 기회균등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회성 상속·증여세를 물리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지속적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법인세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가 유명무실한 기업상속공제제도의 실효성을 높여 가혹한 상속·증여세를 줄여주는 세제개편안을 내놓았지만 국회 통과가 불투명하다. '기업의 번성'과 '고용의 지속'이 다른 게 아니라면 업력을 이어갈 수 있는 합리적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부자감세'라는 프레임으로 기업과 일자리를 걷어차는 한 백년기업은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세금의 기반이 허물어진다. 복지제도도 위태롭게 되고, 연금고갈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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