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본선 실패후 사라진 中감독…"숙청돼서 행복" 분노 쏟아졌다[김지산의 '군맹무中']

머니투데이 베이징(중국)=김지산 특파원 2022.12.03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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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축구 대표팀 감독 리티에, 승부조작에 이권개입... 축구계 부패척결 속도낼 듯

편집자주 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고는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고사성어입니다. 잘 보이지 않고, 보여도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운 중국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그려보는 코너입니다.

월드컵 본선 실패후 사라진 中감독…"숙청돼서 행복" 분노 쏟아졌다[김지산의 '군맹무中']


중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아시아 강호 한국과 일본이 자동 진출하는 바람에 손쉽게 본선에 진출한 게 월드컵 본선 진출의 전부다.

14억 인구에 국력까지, 완벽한 조건에도 중국 축구가 변방에 머무르는 건 부유층 아이들에게나 선수로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는 구조적 허점 때문이었다. 초등학생이 축구학교에 진학하려면 연간 5만위안(약 920만원), 중학생은 5만5000위안(약 1020만원), 고등학생은 6만위안(약 1110만원)이 든다. 중국 예체능은 거의 이런 식이다.



출발부터 싹수 있는 아이들이 극소수로 한정된다. 문제는 이어진다. 상속증여세가 없는 중국에서 어차피 미래가 보장된 부잣집 도련님들에게 헝그리 정신이 없다. 경기장에서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잘 알려진 내용이다. 중국에서도 이런 구조적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당히 높다.



그런데 최근 중국 축구의 고질적 병폐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다. 전 중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 리티에의 무더기 비리가 밝혀진 것이다.

리티에가 2019년 한 프로축구 구단 감독 시절 승부조작을 주도한 사실과 더불어 승부 조작에 가담한 자기 팀과 상대 팀 선수 3명을 국가대표로 선발한 게 드러났다. 한 젊은 선수 연봉을 200만위안(약 3억7000만원)에서 순식간에 600만위안(약 11억6600만원)으로 올렸는데 600만위안의 절반을 챙겼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선수들 연봉을 허위로 인상해 중간에 그 돈을 가로챈 게 사실이라면 횡령이 된다.

여기에 국가대표 감독 시절 광저우와 선양에 소재한 스포츠 관련 기업 9곳에 지분투자를 했는데 이 중 6개는 리티에가 최대주주였다. 리티에는 감독 지위를 이용해 해당 기업들과 집중 거래를 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자기 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것이다.


리티에 계좌에는 현금 1억위안(약 190억원)이 예치돼 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스포츠 전문 기자 리핑캉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리티에 계좌에 1억위안이 있다"며 "그는 우한, 허베이, 광저우 등에서 감독을 한 적이 있지만 국내 축구 감독과 코치의 일반적인 연봉으로는 어림없는 금액"이라고 비판했다.

리티에 비위는 국가체육총국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다롄에서 진행된 아시아축구연맹 및 중국축구협회 전문 코치 교육 과정 마지막 날인 11월10일 국가체육총국 요원들이 그를 소환했는데 그날 이후 그의 휴대폰은 불통이었다.

그리고 보름 뒤인 26일 후베이성 징계위원회는 "리티에가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체육총국의 중앙기율검사위원회 감찰팀과 후베이성 감독위원회 조사를 받고 있다고 온라인에 공지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축구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2월 부주석 신분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해 구두를 신은 채 킥을 하는 모습./사진=머니투데이DB시진핑 국가주석은 축구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2월 부주석 신분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해 구두를 신은 채 킥을 하는 모습./사진=머니투데이DB
중국 축구계 내부에서는 리티에 비리는 축구계 전반에 걸친 부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고백들이 나온다.

그 전면에 축구 국대 출신인 가오레이레이가 서 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폭로했다. 자신은 구단에 뇌물을 바치지 않아 선수 생활이 고단했다고도 했다.

국가체육총국의 수사 표적에는 축구계 거물 다수가 포함됐는데 중국 축구협회도 그중 하나로 알려졌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리티에 성적이 엉망인데도 그와 한통속이어서 감독을 교체하지 않았다는 소문과 관련 있어 보인다.

중국 축구 팬들은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리핑캉 기자가 SNS에 쓴 글에 10만명 이상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이 9000개 넘게 달렸다. 한 누리꾼은 "월드컵이 시작된 이후 리티에 숙청 소식은 가장 행복한 일 중 하나"라며 "중국 축구계의 부패를 바로 잡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이 누리꾼 말대로 리티에 사건은 축구계 전반의 부패 척결 운동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10년째 부패와의 전쟁이 한창인데 이번에 제대로 걸린 셈이다. 시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은 보시라이, 저우융캉 등 권력자들과 판빙빙, 정솽 등 정상급 연예인들을 중형 처벌하고 연예계에서 퇴출했다.

축구계 비리 척결이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시진핑 주석이 축구를 유난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시 주석 취임 이후 고교 입시에서 체육 구기 테스트 종목에 축구를 포함하는가 하면 전국에 2만개 축구 전문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차근차근 양질의 선수들을 키워 2050년 월드컵을 제패하겠다는 목표도 설정했다.

지금 중국 사회에서 축구계 '부패와의 전쟁' 강도가 시 주석 분노 정도와 비례하리라고 짐작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어쩌면 이 기회로 중국 축구가 한층 발전할 수도 있다. 그동안 부정부패 그늘에 가려 실력 있지만 발탁되지 않았던 선수들이 세상에 나올 여지가 지금보다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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