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팀 졌다!" 16강 탈락에 환호한 이란 남성, 보안군 총에 숨져

머니투데이 박가영 기자 2022.12.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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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2022]
'앙숙' 미국전 후 경적 울리던 27세 이란인, 머리 피격…
지인 사망에 이란 대표팀 에자톨리히 "진실 드러날 것"

29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알투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이란 대 미국 경기에서 이란 응원석 관중들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로이터=뉴스1 29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알투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이란 대 미국 경기에서 이란 응원석 관중들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로이터=뉴스1


이란이 '정치적 앙숙' 미국에 패배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대표팀 탈락을 공개적으로 기뻐하던 이란 남성이 자국 보안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숨진 남성은 이란 월드컵 대표팀의 미드필더 사이드 에자톨리히와 어린 시절 축구를 함께 하던 친구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메흐란 사마크(27)는 이날 이란의 카스피해 연안 도시 반다르 안잘리에서 이란 대표팀의 패배를 축하하며 자동차 경적을 울렸다가 보안군의 총격을 받았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IHR)는 "이란 대표팀이 미국에 진 뒤 사마크가 보안군의 직접적인 표적이 됐고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란은 정치적으로 오랜 앙숙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반미 정권이 들어섰고, 같은 해 벌어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후 이란의 핵 개발과 이에 따른 미국의 경제 제재 조처로 두 나라가 갈등과 협상을 반복하면서 수십 년간 충돌을 이어왔다.



하지만 상당수의 이란인은 이번 월드컵에서 자국 대표팀이 미국에 패배하길 기원했다. 민심을 보여주듯 미국전 패배 직후 이란 곳곳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은 반정부 성향의 시민들이 이란 대표팀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있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란 대표팀이 출국 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을 만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분노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 집권한 보수 강경파인 라이시 대통령은 집권 후 여성들의 복장 단속을 강화하는 등 여성 인권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잡 의문사'로 시작된 이란 반정부 시위는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는 지난 9월 13일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는데, 사흘 만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심장마비로 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경찰이 진압봉으로 아미니의 머리를 때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격화했다.


이란 월드컵 대표팀 사이드 에자톨리히가 인스타그램에 게재한 사마크 관련 게시물/사진=인스타그램 캡처이란 월드컵 대표팀 사이드 에자톨리히가 인스타그램에 게재한 사마크 관련 게시물/사진=인스타그램 캡처
가디언은 사마크가 미국전에 출전한 에자톨리히의 지인이라고 전했다. 에자톨리히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어린 시절 유소년축구팀에서 사마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너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무너진다"며 "언젠가 가면이 벗겨지고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 우리 민족이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분노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이란인권센터(CHRI)는 이날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사마크의 장례식에서 추모객들이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한편 이란 대표팀 일부 선수는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대표팀 간판 사르다르 아즈문은 월드컵을 앞두고 소셜미디어(SNS)에 "이란 여성과 민중을 죽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에 대한 처벌이 국가대표 제외라면, 그것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다"며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란 대표팀은 지난달 21일 조별리그 1차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국가 제창을 거부하며 저항 의사를 밝혔다. 이에 이란 당국이 가족을 볼모로 삼으며 선수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란 대표팀은 미국전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아즈문은 땅을 바라본 채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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