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강화했지만 '사망자' 되레 늘어"...'자율 예방' 중심으로 전환

머니투데이 정진우 기자 2022.11.3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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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대재해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지금껏 형식적으로 운용되고 있던 기업의 ‘위험성평가’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8년째 정체 중인 산재 사고사망 만인율을 오는 2026년까지 0.29로 감축하겠다는 계획이다. 2022.11.3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대재해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지금껏 형식적으로 운용되고 있던 기업의 ‘위험성평가’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8년째 정체 중인 산재 사고사망 만인율을 오는 2026년까지 0.29로 감축하겠다는 계획이다. 2022.11.3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17년 964명 → 2018년 971명 → 2019년 855명 → 2020년 882명 → 2021년 828명'

최근 5년간 산업현장에서 발생한 중대재해로 사망한 근로자의 숫자다. 사망자 수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800명을 넘어선다. 중대재해는 개인의 생명과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고, 사회적 갈등은 물론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다.



중대재해에 있어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크게 뒤쳐져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고사망만인율(인구 1만 명당 사망자 수를 비율로 나타낸 것)은 0.43‱(퍼밀리아드)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국 중 34위다. 산업현장 안전 선진국인 영국의 1970년대, 독일·일본의 1990년대 수준이다. 영국은 1974년에 0.34‱였고 1994년에 독일은 0.42‱, 일본은 0.46‱였다.

최근 산업안전법 전면개정(2020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등 처벌을 강화했지만 여전히 중대재해는 줄지 않고 있다. 올해 1~9월까진 510명의 근로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2022년 1월27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사망자 수는 오히려 8명 늘었다. 대전 아울렛 화재, SPL 끼임사고, 안성 물류창고 붕괴 등 근로자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기본 안전수칙 미준수로 인한 사고가 많다. 지난해 기준 추락(42.4%)·끼임(11.5%)·부딪힘(8.7%) 등 사고가 전체의 62.6%에 달한다. 지난 20년간 50~60% 내외로 고착화되는 경향이다. 사고 원인으로 보면 방호조치 불량(30.9%), 작업절차 미준수(16.5%), 위험성평가 미실시(16.1%), 근로자 보호구 미착용(15.6%) 등 순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제조업과 건설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고령자, 외국인 근로자 등 안전에 취약한 계층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중대재해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게 현실이다.

"처벌 강화했지만 '사망자' 되레 늘어"...'자율 예방' 중심으로 전환
중대재해를 줄이려면 산업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사고 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문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게 선진국들의 교훈이다. 이번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이 나온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다. 무조건 처벌만 해서는 효과가 떨어지는 만큼 자율예방 중심으로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3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세계 10위권 선진국에 걸맞게 중대재해 감축 정체기를 극복하고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존 사고와 방식에서 벗어나야한다"며 "산업안전 패러다임을 대전환하고 중대재해 감축에 국가적 역량을 모으기 위해 이번 로드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1981년 사업장 안전의 기본법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한 이래 규제와 처벌에 주안점을 두고 중대재해 감축 전략을 유지해 왔다. 산업안전보건법령은 1220개 조항으로 방대하다. 뿐만 아니라 법령이 본래 가지는 제약상 획일적·일반적인 것이 많아, 개별 사업장의 특성 및 여건 등이 반영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노사가 이행하는 과정에서 기본 취지인 사업장의 안전을 향상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법령의 세세한 기준을 맞추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규제의 내용 또한 급변하는 신기술의 반영이 지체되어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등 안전보건규정이 시대 흐름에 뒤떨어지는 문제도 심각하다.

산업안전감독도 마찬가지다. 매년 2만~3만개 사업장에 대해 감독을 실시하고 있으나 주로 적발과 처벌에 중점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사고를 유발하는 요인보다 안전관리자 선임, 안전보건교육 실시 여부 등 적발하기 쉬운 서류상 점검에 치중한다. 지난 5년간 특별감독을 실시한 83개 기업 중 12개 기업에서 사망사고가 재발하는 등 감독의 예방 효과도 미흡하다.
"처벌 강화했지만 '사망자' 되레 늘어"...'자율 예방' 중심으로 전환
많은 기업에선 안전 역량을 체계적으로 향상하는 일보다 당장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서류작업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법 준수 여건이 취약하고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경우 아예 안전관리를 방치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 심화되고 있다.

기존의 산업재해로부터 동종·유사 재해의 재발 방지를 위한 교훈을 얻지 못하고, 기본적 안전대책조차 갖추지 못한 기업도 많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었던 한 식품회사의 경우 5년간 동일·유사한 끼임 사고가 15건이나 발생했음에도 별다른 대책을 취하지 않은 채 생산을 계속해오다 결국 끼임 사망사고로 이어졌다.

우리보다 먼저 중대재해 감축의 정체기에 직면했던 선진국은 1970년대 이후 사전 예방에 더욱 중점을 두고 노사의 자발적 노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스스로 파악하여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위험성평가' 제도를 중심으로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이는 그간의 경험에 비춰 다수의 입법을 통한 촘촘한 정부 규제와 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사망사고를 줄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자기규율 예방체계로의 전환 이후 선진국의 중대재해는 크게 감소했다. 영국은 자기규율 예방체계에 기반한 산업안전보건법 제정(1974년) 이후 5년 만에 사고사망만인율이 30%(0.34 → 0.24‱) 줄었다.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중대재해가 감축됐다. 현재 영국, 독일의 사고사망만인율은 각각 0.7‱, 0.8‱로 우리나라의 2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 장관은 "중대재해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산업안전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번 로드맵을 토대로 내년 상반기까지 재계와 노동계, 학계 등과 충분히 논의해 중대재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또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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