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마블',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지난 10년간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이런 장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였다. 영화계의 흥행 기록을 새로 써내려간 것은 이들이 벌어들인 수익에 비하면 그저 부수적인 명예 따위일지도 모른다.
이런 MCU 히어로들을 향한 기류 변화는 영화 ‘캡틴마블’에서 시작됐다. 브리 라슨이 연기하는 캐럴 댄버스는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우주를 수호하는 캡틴 마블이 되지만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캡틴’인 스티브 로저스에 비하면 대중이 느끼는 친근함이 덜한 편이다. 물론 우주를 떠돌던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를 지구에 귀환 시켜주고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함대를 박살낸 것은 고맙지만.
이처럼 관객들이 ‘캡틴 마블’에서 느낀 기묘한 찜찜함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긴급하게 이뤄진 후계 승계 작업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팔콘&윈터솔저’에서는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가짜 영웅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내세운 정부의 만행들을 펼쳐 보이며 왜 팔콘(샘 윌슨)이 스티브 로저스의 방패를 물려받아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그럼에도 과거 자유를 억압하는 파시즘, 나치즘에 맞섰던 1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지난 서사와 비교하면 제2대 캡틴 아메리카 샘 윌슨의 서사는 다소 빈약해 보인다. 특히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팔콘의 날개를 여전히 활용한 채 손에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만 들고 있는 모습은 두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소개된 신세대 히어로들은 더욱 가관이다. 영화 ‘블랙 위도우’를 통해 소개된 2대 블랙 위도우 예정자인 옐레나 벨로바는 드라마 ‘호크아이’에 등장해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클린트 바튼에게 무작정 폭력을 휘두른 후 사라지는가 하면, 파키스탄계 미국인 소녀인 카말라 칸의 이야기를 드린 ‘미즈 마블’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내전 이야기를 집어넣고 화려한 그래픽을 사용해 관객들을 현혹시킨다. 여기에 ‘엑스맨’들을 지칭하는 뮤턴트라는 단어까지 사용해 납득하기 어려운 ‘떡밥’을 투척, 관객들을 낚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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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헐크',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이터널스’도 마찬가지다. 인피니티 사가에서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새 히어로 집단 구성원 10명을 한꺼번에 소개하는가 하면 셀레스티얼이라는 우주적 존재, 데비안츠라는 괴생명체의 존재까지 단번에 주입시킨다. 그 와중에 이터널스를 다인종으로 구성해 정치적 올바름도 놓치지 않았다.
이처럼 MCU의 페이즈 4 전개는 주입식 교육과 강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피니티 사가 때 보여주던 침착함은 어디 가고 ‘볼 사람만 보라’는 식이다. 이런 MCU의 부정적 변화는 모두 이들이 새로 소개한 캐릭터들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적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슈퍼 히어로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혈안이 된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슈퍼 히어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지금의 MCU가 다시 찾아야 하는 초심은 바로 이 엔터테인먼트인 것이다.
그럼에도 정 그렇게 교훈을 주고 싶다면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토니 스타크의 핑거 스냅처럼 세련된 방식을 사용해 주길 바란다. 관객 그 누구도 그의 핑거 스냅을 보고 ‘숭고한 희생’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훈은 이렇게 노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주는 것이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무비의 본분을 잊지 않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