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얼굴인데 낯선 이름, '팔색조 배우' 최대훈

머니투데이 조이음(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10.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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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짜리 변호사'서 반전매력 캐릭터로 시청자 사랑 한몸에

사진제공=SBS '천원짜리 변호사'사진제공=SBS '천원짜리 변호사'


지난해 이맘 즈음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로부터 아쉬움 섞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과 달라진 드라마 제작 환경 탓에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있어도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다는 말이었다. 특히 작품마다 각기 다른 배역을 맡아도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는 배우일수록 “스케줄 잡기는 어렵다”고 했다. 당시 누군가를 특정하고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이후부터 마치 필터라도 갈아 끼우듯 작품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시청자와 마주하는 몇몇 배우의 연기를 볼 때마다 그때의 대화가 떠오르곤 했다.

배우 최대훈 역시 그 대화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올해만 해도 영화 ‘헤어질 결심’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모범형사2’ ‘인사이더’에 이어 현재 방송 중인 SBS 금토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극본 최수진 최창환, 연출 김재현 신중훈)까지. 그에게만 하루가 48시간으로 허락되기라도 했던 건지, 단기간에 많은 작품에서 매번 다른 얼굴로 시청자(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말이다.



‘천원짜리 변호사’에서 최대훈이 연기하는 서민혁은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견고하길 바라는 법조계 로열패밀리 출신의 검사다. 오랜 시간 짝사랑해온 백마리(김지은)와의 결혼을 꿈꾸는 순정남 면모와 더불어 백마리 할아버지가 세운 법무법인 백을 법무법인 ‘백 앤 서’로 만들겠다는 야망도 품었다. 다만 이 야망이 계산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일할 때엔 프로페셔널한 면모가 빛나는 검사이지만 그 이면엔 일거수일투족을 아빠와 의논하는 철부지 파파보이가 있기 때문. 단지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미국 연수를 끝내고 2년 만에 돌아온 다 큰 아들이 반갑다며 엉덩이를 토닥여주는) 아빠께 더 큰 기쁨을 안겨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결론이기에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이처럼 단순한 서민혁이지만, 극 초반 이 캐릭터는 시청자들로부터 ‘빌런 캐릭터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하나의 살인사건을 두고 과거 검사 동기였던 천지훈(남궁민)과 법정에서 마주한 그가 천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사건을 사이에 둔 피고인 측 변호사와 검사, 또는 오랜만에 마주한 과거 동기를 대하는 것과는 다른 서민혁의 태도에서 은근하지만 분명한 거부감이 읽힌 탓이었다. 화면 너머로까지 전달된 반감에 시청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수임료로 고작 천 원을 받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선량한 변호사 천지훈의 뒤통수를 때리기 위해 단순한 척하며 가까이에 머무는 악당 정도로 생각한 거다. 전작들에서 팔색조 같은 캐릭터 소화력으로 한계 없는 연기를 보여준 최대훈이었기에, 똑똑한 검사가 이렇게나 단순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인물일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도 합리적인(?) 의심의 수순이었다.



사진제공=SBS '천원짜리 변호사'사진제공=SBS '천원짜리 변호사'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천지훈을 향한 서민혁의 거부감은 절친했던 관계에서 풀지 못한 서운함의 표현이었다는 게 드러났고, 시청자들은 안심하고 있다. 결국 서민혁은 지금까지 최대훈을 통해 만났던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고, 최대훈이 쌓아올린 그동안의 필모그래피가 서민혁의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면모를 한층 빛나게 한 셈이다. 그의 설명처럼 서민혁이 지닌 ‘어른 아이’ 같은 면모의 웃음은 강조하되 모자라 보이지는 않는 활약이 완성됐다.

최대훈은 2002년 데뷔에 데뷔해 주로 연극, 뮤지컬로 무대에 섰다. 당시의 경험이 지금 그의 연기 스펙트럼이 됐다. 필자의 기억 속 그의 드라마에는 ‘각시탈’도 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출연한 건 2017년 무렵이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만났고, 그 덕분에 시청자들에게 그의 이름보다 극 중 캐릭터 이름이, 그리고 각 드라마 속 모습이 더욱 익숙한 배우가 됐다. 올해 공개된 작품들에서만 해도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해준(박해일)이 찾은 수면 클리닉 센터의 의사로, 올해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정명석(강기영)의 라이벌 장승준 변호사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변호사 사무실 한켠에 온몸의 피를 거꾸로 돌려준다는 운동기구에 누운 모습의 첫 등장은 강렬하게 남아 이후의 얄미운 말투와 행동이 위협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다. ‘인사이더’에서는 교도소 내 최약체부터 도박판 2인자, 김요한(강하늘)의 조력자까지 전개에 따라 반전을 거듭하는 노승환으로, ‘모범형사2’에서는 폭행 사건부터 살인사건까지 벌어지는 사건마다 악에 선 티제이 그룹 부회장 천상우 역으로 등장해 서늘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최대훈의 작품 속 얼굴 가운데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유세리(손예진)의 오빠 유세준, ‘괴물’ 이동식(신하균)의 죽마고우이자 의미심장한 경찰 박정제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최대훈은 최근 공개된 한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캐릭터로는 알아보면서도 이름은 생소해하는 것에 대해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서도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은 내 이미지가 나는 좋다”고 말했다. “한순간 끓어올랐다가 쉽게 사라지거나 질리는 것보다 늘 낯설어 보이는 게 낫다”는 그의 말이 연기자로서 그의 지향점을 생각게 한다. 천연덕스러운 연기력 덕에 어떤 캐릭터로도 녹아드는 배우, 분명 익숙하지만 작품마다 낯선 얼굴을 보여주는 배우. 설사 다른 작품에서 연달아 비슷한 캐릭터로 만난다 해도 분명 인물의 다른 무엇을 보여줄 거라는 걸 기대하게 만드는 배우라는 점에서 그의 이름이 익숙해지는 건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미리 말해두고 싶다.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또 어떤 작품에서 그를 만나게 될지,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보는 하나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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