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통신사는 더 이상 '갑(甲)'이 아니다

머니투데이 변휘 기자 2022.10.07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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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휘 /사진=변휘변휘 /사진=변휘


'망 중립성((Net neutrality)'은 2003년 미국 컬럼비아대의 미디어법 학자인 팀 우(Tim Wu)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통신사 등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가 특정 콘텐츠나 인터넷 기업을 차별·차단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도 통신사가 스마트TV 프로그램이나 카카오톡의 보이스톡을 차단한 전례가 있다. ISP가 갑(甲)이던 시절, 이는 CP(콘텐츠사업자)에게 핵심적인 방어 논리였다.

지금은 어떨까. 망 중립성 원칙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도전에 직면했다. 구글과 넷플릭스, 페이스북 등 미국 ICT(정보통신기술) 기업들이 ISP를 압도하는 글로벌 공룡 사업자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글로벌 CP가 갑이다. 만일 SK브로드밴드가 유튜브를 차단한다면? 가입자들은 모두 KT와 LG유플러스로 갈아탈 게 뻔하다.



그런데 ISP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 2017년 약 370만TB(테라바이트)였던 국내 트래픽 총발생량은 지난해 900만TB에 육박했다. 특히 글로벌 빅테크의 트래픽 비중이 커지는 추세다.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발생한 국내 트래픽 발생량은 구글 27.1%, 넷플릭스 7.2%, 메타(옛 페이스북) 3.5%, 네이버 2.1%, 카카오 1.2% 순이었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등의 대중화로 트래픽이 그야말로 폭증세다. ISP의 인프라 투자 비용도 덩달아 치솟는다. 최근 3년간 국내 통신사들은 연 평균 8조원 가량을 설비투자에 쏟아부었다. ISP가 글로벌 CP를 향해 더는 망 중립성에 기대지 말고 망 사용료를 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CP와 ISP는 공생 관계다. ISP가 인터넷망을 유지·관리하지 않으면 CP들은 사업이 불가능하고, CP가 인터넷을 정보와 즐길 거리로 채우지 않으면 이용자들은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을 것이다. 건전한 공생을 위해 양자 간 얼마나 비용을 부담할지 협상하면 된다. 그러나 협상의 전제 조건이 될 힘의 균형은 이미 깨졌다. 구글과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한국의 일개 통신사가 넘볼 수준이 아니다.

실제 소송전이 벌어지면서 사업자 간 원활한 협의는 물건너갔다.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감사에서 "과거 ISP가 우월적 지위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글로벌 CP가 우월적이다. (사업자 간)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시장 실패의 상황"이라 진단했다. '망 사용료 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그래서 등장했다. 통신3사 입장만 반영됐다는 지적이 있지만, 글로벌CP만 배 불리는 현실도 온당치 않다.

이미 벌어진 시장 실패의 해결은 정치의 몫이다. 더는 공정하지 않은 망 중립성 원칙을 버리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망 사용료 법에 대한 부정적 온라인 여론에 여야 모두 주저한다. 여당은 "야당이 추진하던 것"이라 말하고 야당은 "여당의 입장은 어떤가"라고 되묻는다.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7개 법안은 그대로인데, 이제와서 표정을 바꾼다. 이젠 정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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