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고 숙고하는 덴마크 의회의 교훈

머니투데이 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 2022.10.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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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춘의 여의도 빅데이터]세계 최고 수준 법률안 발의 건수와 통과율의 명암

▲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


크리스티안스보르(Christiansborg).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성(castle)의 명칭이다. 1794년, 1884년 두 번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7년부터 1928년까지 네오바르크 건축양식으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성에 국회의사당, 총리 관저, 대법원 청사가 함께 입주하고 있다. 덴마크의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 한 건물에 모인 셈이다.



필자는 유학 시절 덴마크 국회의사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의사당 건물 외부와 내부의 장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덴마크 의회 운영의 원칙과 철학이 잘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의사당의 정문 출입문 위에 부조 형태의 4개의 조각이 있는데, 두통, 치통, 복통, 이통(耳痛)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형상화하고 있다. 국민의 다양한 고통과 어려움을 빠짐없이 살피라는 의미다.



국회의사당 내부는 벽지로 장식돼 있다. 거미, 달팽이처럼 느린 생물 모양의 무늬로 장식돼 있다. 의원들이 법률안 등을 심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절대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경청하고 숙고하라는 의미에서다.

우리나라 국회는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빨리빨리’ 풍토가 뿌리 깊다. 예를 들어보자. 법률안 제출 실적을 보면 단연 세계 1위다. 통과율도 32.1%(20대 국회)로 최고 수준이다.

20대 국회(2016~2020년) 통계를 들여다보면. 같은 기간 법률안 제출 건수는 24,141건(연평균 6,035건)이나 된다. 의원 1인당 평균 80.47건을 발의한 셈이다. 연간 기준으로는 의원 1인당 20.1건이다. 통과율이 32.1%이므로, 10건의 법률안 중 3건이 통과된 셈이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비교해보자. 2019년 한 해 동안 미국 의회는 8,223건의 법률안이 제출됐다. 하원 의원 1인당 평균 18.9건을 제출한 것이다. 법률안 제출 건수는 우리나라 국회보다는 다소 낮은 수준이지만, 통과율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 의회의 법률안 통과율은 6.9%로 우리나라 국회의 32.1%에 비해 크게 낮다.

OECD의 다른 국가 의회의 통계도 살펴보자. 법률안 발의 건수만을 놓고 보면 다소 충격에 가깝다. 독일 의회는 연평균(2017~2019년) 151건으로, 우리나라 의회의 2.5% 수준이다.

스위스 의회는 연평균(2015~2019년) 104건, 일본 의회는 연평균(2010~2019년) 202건, 프랑스 의회는 연평균(2010-2019년) 461건을 기록했다.

많은 법안을 발의하는 국회가 더 좋은 국회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법률안 통과율이 높은 국회가 일 잘하는 국회가 아님은 명확하다. 우리나라 국회는 법률안 폭주 상태다. 제대로 된 심의를 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선 지 오래다.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법률안 제출 건수를 기준으로 국회의원의 실적을 평가하는 정당의 평가 시스템이나 언론의 보도 실태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상식적이지만, 법률은 국가운영의 기틀이 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되새김질하자. 그리고 덴마크 의회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에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경청하고 심사숙고하자.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이가 아프고, 귀가 아플 만큼 말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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