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이지혜 디자인기자
지난 10개월간 '영 케어러(Young Carer)'들을 만나온 서울 서대문구의 사회복지사 손지윤씨(29)는 현장에서 홀로 부모나 조부모를 돌봐야 하는 영케어러들을 만났을 때 어떠냐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미래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안쓰러워했다.
손씨가 접한 대부분의 영 케어러들은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어려움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심적인 부담과 함께 의료·교육비 등 경제적 어려움이 대표적이다. 그는 "아직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청년들이 오히려 미래를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누군가의 도움이 없어 막막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사회적 인식은 높아졌지만, 아직 '영 케어러'에 대한 실태조사는 물론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게 현실이다. 전문가들도 해외의 수치를 단순 대입해 규모를 유추할 뿐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해외 영 케어러 지원 제도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는 약 18만4000명에서 29만5000명의 영케어러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마저도 11~18세 사이의 청소년 인구만 대상으로 집계한 것으로 실제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살고 있는 '영 케어러' 이모씨(23)는 학창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점을 꼽았다. 그는 "시험 기간 할머니가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신 적이 있었다"며 "내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서 취업하는 것뿐이었는데 그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심한 우울감에 빠졌다"고 말했다.
정서적으로 우울감 느껴…자립 돕는 제도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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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코로나19(COVID-19)는 영 케어러들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노씨는 "코로나19 사태 때 엄마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며 "어머니의 병환을 지켜보는 건 알고 있어도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2020년 영국의 간병인 자선단체 '케어 트러스트'(Carers trust)가 12~25세 영 케어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코로나19 이후 △'정신건강이 더 나빠졌다'고 답한 비율은 12~17세 40%, 18~25세 59%, △'미래가 더 두러워졌다'고 답한 비율은 12~17세 67%, 18~25세가 78% △'고립감을 느낀다'고 답한 비율은 12~17세 69%, 18~25세 69%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존의 사회복지 시스템으로 '영 케어러'들을 지원하는데엔 한계가 있다. 금전적 지원만으론 부족한게 사실이다. 이씨는 "가령 저소득층 학생이 학교에서 방과 후 교육이나 온라인 강의 등을 지원받는다고 했을 때 영 케어러들은 그 시간에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손씨도 "영 케어러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구직 및 진학 등 제도적인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선제적 발굴로 자립 도와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또 청소년의 경우엔 학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학교의 관리가 필요하다. 국회입법조사처의 '해외 영케어러 지원 제도와 시사점'에서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잦은 결석, 과제 미제출 등을 보이는 학생이라면 가정에서 가족을 돌보고 있는 아동이나 청소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어느 곳에 이들을 연계해줘야 하는지 지침서를 제작해 학교에 배포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김진수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선제적인 '영 케어러' 발굴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대구 청년 간병인 사건뿐 아니라 수원 세모녀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복지 수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며 "동네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민간 분야와 협력해 영 케어러를 찾아내고 필요한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