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우(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에술대학원 교수)
갑오왜란(1894년)과 을미왜변(1895년)을 겪은 이후 고종은 국제사회에서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개혁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6년 후 서울은 위의 기사처럼 완전히 변모했다. 광무 6년(1902년)에 개최될 예정이던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에 참석할 각국 사절단에게 근대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중립외교 노선을 표방해 제국주의의 파도로부터 한국을 지키고자 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개최하기 위해 공항, 도로, 지하철, 호텔, 예술의전당 등 각종 부대시설을 건설하고 시민들의 옷차림과 생활습관까지 정비하는 현대의 노력보다 더 숨가쁜 6년이었다. 그 중심에 정동과 경운궁(현 덕수궁)이 있었고 국제적 문명국가의 조건에 극장 건축도 포함돼 있었다. 정동 부근의 극장들을 건축된 순서대로 살펴본다.
두 번째로 정동 부근에 세워진 극장은 '동양극장'이다. 1935년 11월 새문안로의 현 문화일보 자리에 무용가 배구자가 건립한 민간 최고의 연극 극장으로 객석 규모는 648석이었고 회전무대 등 신식 설비를 갖췄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연극의 요람 역할을 한 이 극장은 1990년 연극인들의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철거돼 그 자리에 빌딩이 들어서고 말았다.
네 번째는 1976년 개관한 '세실극장'이다. 영국성공회의 부속건물로 설립된 이 극장은 한국 성공회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제4대 한국교구장 세실 쿠퍼 주교의 이름을 명명했다. 1977년부터 연극인회관으로 사용되면서 제1~4회 대한민국연극제를 개최했고 지금은 국립정동극장이 맡아서 운영한다.
마지막으로 1995년 개관한 '국립정동극장'이다. 정동길과 덕수궁길이 만나는 정동 한복판에 지어진 이 극장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했다. 원각사는 위에서 언급한 한국 최초 극장 협률사 희대다. 하지만 그 목적과 달리 현대식 일반 극장이 지어지고 말았다. 제대로 연극할 극장이 부족하던 당시 여건을 감안하면 그 선택을 나무라기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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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을 재건축한다고 한다. 그 면적이면 지하에 현대식 극장을 하나 짓고 지상에 협률사 희대를 복원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극장은 이제 많이 있다. 그 많은 현대식 극장의 리스트에 굳이 또 하나를 보탤 게 아니라 한국 최초 국립극장인 협률사 희대가 복원돼 일제에 의해 좌절된 자주적 근대화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