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거견필반'..삼성이 키운 은퇴 안내견의 '현명한 하루'

머니투데이 유승목 기자 2022.09.2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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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안내견 현명이 유년 시절 인연 맺은 '퍼피워커'들과 황혼 보내

은퇴 안내견 현명이.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은퇴 안내견 현명이.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지난 20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화재안내견학교에선 8마리의 특별한 리트리버들이 시각장애인의 품에 안겼다.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유명한 삼성화재 (299,500원 ▲2,000 +0.67%)안내견학교에서 2년여간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을 마치고 졸업한 신입 안내견들이다. 훈련사와 자원봉사자들은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시각장애인들의 눈과 발이 될 안내견들의 새로운 삶을 축하해줬다.

하지만 이날 더욱 눈길을 끈 건 현역 안내견을 뜻하는 노란색 조끼를 벗고 주황색 조끼로 갈아입은 6마리의 리트리버다. 저마다 6~8년 간의 안내견 활동을 마치고 퇴역한 견공(犬公)들이다. 사람으로 치면 10대 때부터 훈련을 받은 뒤 청춘을 바쳐 시각장애인과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은퇴한 60대 노인이다. 대형견의 평균 수명이 짧은 편을 감안하면 남은 세월은 길어야 수 년 남짓이다. 평생을 사람을 위해 희생해 온 안내견들은 어떤 황혼을 보낼까.



거견필반(去犬必返)..8년 만에 돌아온 현명이
은퇴 안내견 현명이와 장정아씨 가족들의 모습.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은퇴 안내견 현명이와 장정아씨 가족들의 모습.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장정아씨(54) 가족은 지난해 서울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앞마당에 잔디가 깔린 경기도 기흥의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지난해 광풍이 분 부테크(부동산+재테크)를 위한 목적도, 코로나19(COVID-19)를 피한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래 전 떠나보냈다가 8년 만에 돌아오게 된 가족 현명이의 견생 2막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스위트홈이다.

현명이는 지난해 11월 은퇴한 안내견 출신의 래브라도 리트리버다. 2012년 태어나 2년여 간 훈련을 받고 2014년부터 8년 동안 안내견으로 활동하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자유견이 됐다. 산책 중 건널목을 만나면 걸음을 멈춰서 위험한지 살피는 등 여전히 몸에 현역 시절의 긴장감이 남아 있는 은퇴 초보인 현명이는 장정아씨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고령이 돼 은퇴한 안내견은 새가족 품에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 물론 아무 가정에나 입양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손발을 맞췄던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우선 입양권을 주고,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삼성화재안내견센터와 동행하는 '퍼피워커'들과 함께할 수 있다.

안내견은 생후 3~14개월 유년시절에 일반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경험하며 사회화 과정인 '퍼피워킹(강아지 걸음마)'을 거치는데, 이를 돕는 자원봉사자들이 퍼피워커다. 양성과 사후관리까지 한 마리당 1억원이 넘는 교육과정과 안내견 생애주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오래 전 안내견과 인연을 맺었고 관리나 보살핌 측면에서도 뛰어난 터라 삼성화재안내견학교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연이 운명으로.."제가 데려갈게요"
지난 20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안내견학교에서 열린 '함께 내일로 걷다' 행사에서 시각장애인 파트너와 이들과 함께 새롭게 안내견 활동을 시작하는 안내견, 퍼피워커(자원봉사자), 삼성화재안내견학교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뉴스1지난 20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안내견학교에서 열린 '함께 내일로 걷다' 행사에서 시각장애인 파트너와 이들과 함께 새롭게 안내견 활동을 시작하는 안내견, 퍼피워커(자원봉사자), 삼성화재안내견학교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뉴스1
장정아씨도 현명이의 유년시절을 함께한 퍼피워커다. 생후 9주 차에 위탁받아 백화점·지하철 등 다양한 곳을 다니며 사회화 교육을 했다. 하지만 장정아씨 가족은 오히려 현명이에게 배운 게 많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품하는 모습만 봐도 스트레스와 피로가 풀렸다"며 "사춘기를 겪으며 각자의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딸들이 현명이를 보느라 거실로 나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회상했다.


짧은 1년 간의 퍼피워킹을 지나 안내견의 자질을 갖춘 현명이는 장정아씨 가족과 헤어져 새 가족을 만났다. 시각장애인 황인상씨의 파트너가 됐다. 시각장애인 밴드 등에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는 황인상씨의 안전을 책임지며 활약했다. 황인상씨는 현명이를 두고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친구"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8년 간 활동을 마치고 은퇴를 앞둔 현명이를 생각하던 황인상씨는 장정아씨 가족을 떠올렸다. 현명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현명이를 매개체로 인연을 맺은 두 가족은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며 1년에 한 번 현명이 생일에 만나 축하를 나누기도 했다.

현명이를 맡아줄 수 있을지 먼저 제안한 황인상씨 가족이다. 혹시라도 부담스러울까봐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얘기를 직접 듣게 된 장정아씨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단다. 이를 두고 정한삼 삼성화재안내견학교 프로는 "퍼피워커로 만난 강아지를 은퇴 후에 다시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 같이 있지 못해도…"함께 걸어줄게"
은퇴 안내견 현명이.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은퇴 안내견 현명이. /사진제공=삼성물산 리조트부문
1년의 동거와 8년의 기다림 끝에 재회한 현명이와 장정아씨 가족의 모습은 8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다. 장정아씨는 "털색이 조금 흐려진 거 외엔 8년 전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새로운 안내견 친구를 분양 받은 황인상씨도 종종 장정아씨 가족을 찾는다. 현명이가 어떤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직접 보고싶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현명이가 어린 유년시절처럼 뛰어놀 순 없다. 규칙적인 생활과 사랑 속에서도 10살의 노견의 시간을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삼성화재안내견학교가 안내견의 은퇴 시기를 다소 일찍 잡는 이유다. 정한삼 프로는 "은퇴 가능한 나이는 7살부터지만 10살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며 "10살이 넘으면 새 가족과 함께할 날이 얼마 없어 가능하면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안내견을 접한 이들은 한결같이 안내견 양성은 안내견학교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많은 시간과 비용은 물론이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숱하 노력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장정아씨 가족도 현명이를 다시 만나기까지 훈련사와 시각장애인 황인상씨 등의 노력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는 "현명이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고생해주신 분들의 노고를 잘 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할 테니 끝까지 믿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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