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리더의 고뇌, 리더십의 이중성

머니투데이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2.08.29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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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지난 7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주역인 신교계 얼스터통합당(UUP)의 데이비드 트림블 전 대표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평화협정을 이끈 또다른 주역 존 흄 구교계 사회민주노동당(SDLP) 전 대표는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1969년 이후 30여년 동안 지속된 신·구교계 사이의 유혈충돌을 종식한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을 이뤄낸 공로로 같은 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북아일랜드 문제의 본질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민족과 종교의 차이를 동원해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강화해나간 배타적 정체성의 충돌이었다.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구교도 45.1%, 신교도 48.4%로 나뉜 이들의 갈등은 오랜 기간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첩돼 모두가 가난한 이 지역에서 사실상 가난한 신교도 노동자와 가난한 구교도 노동자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비참한 현실의 악순환이었다.

예컨대 1993년 10월 북아일랜드 신교도 지역인 샨킬가의 생선가게에서 2명의 아일랜드공화군(IRA) 대원이 얼스터방위연합(UDA)의 지역지도자를 목표로 폭탄을 설치했다. 그러나 폭탄이 일찍 터지는 바람에 산모 뱃속의 아기를 비롯해 무고한 시민 10여명이 죽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교도 저격수가 6명의 구교도를 암살했고 신교도 계열의 얼스터자유전사(UFF)가 구교도 지역의 그레이스틸 마을에 있는 술집을 습격해 8명을 죽였다.



계속되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 결국 모두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북아일랜드를 뒤덮었을 때 사태의 반전이 일어났다. 샨킬가와 그레이스틸 참사 1주기인 1994년에 더이상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해를 관철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구교계 아일랜드공화군과 신교계 민병대가 휴전을 선언한 것이다. 곧이어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가 협상을 시작했고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를 대표하는 정당과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다자협상이 진행됐다. 일련의 대화와 협상은 마침내 1998년 성금요일협정으로 이어졌다.

트림블과 흄은 각각 신·구교계를 대표한 이 협상의 주역이었다. 평화정착 과정에서 정치지도자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기존 갈등의 요소를 한꺼번에 부정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미래의 화합을 위한 인식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즉 과거 폭력시대를 극복하고 동시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자는 협상이 가져온 불확실성에 대해 상황이 안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1998년 평화협정에서 트림블과 흄이 온건파이자 다수파를 대표해 협상을 주도했다면 이언 페이즐리가 이끈 신교계의 민주통합당(DUP)과 제리 애덤스가 이끈 구교계의 신페인당은 소수 강경파를 대표했다. 그러나 민병대 무장해제를 둘러싸고 애초 협정에 명시한 2년의 기한이 10여년으로 늘어나고 간헐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온건파는 2003년 총선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잃었고 2007년 실질적인 첫 연립정부는 민주통합당과 신페인당 사이에 이뤄졌다. 그리고 2022년 총선에서 신페인당은 북아일랜드 제1당이 됐다.


대화 시도를 곧 배신으로 여긴 분열의 시대에 적을 향해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는 적과의 전쟁 중에도 동시에 평화를 모색해야 하는 이중의 사명을 안고 있다. 온건파 트림블과 흄의 결단은 훗날 자신들의 정당이 몰락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나타나지만 이들의 헌신 속에 북아일랜드 정치는 상대방의 멸절과 실지회복을 통한 통일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상호 인정을 통한 평화공존이라는 현실의 길로 중대한 전환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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