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은빈, 성실함을 동력 삼아온 일류 배우

머니투데이 한수진 기자 ize 기자 2022.08.24 13:27
글자크기
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


배우 박은빈을 마주한 순간 '단단하다'는 말의 어원을 실감했다. 그는 곱고 단정한 얼굴과 가녀린 외형을 지닌 배우다. 만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듯한 청순 만화 주인공 재질이라고 할까. 그러나 대화 몇마디를 나눠 보면 전혀 다른 매력을 보게 된다. 눈빛은 깊고, 어투는 똑부러진다.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재질의 단단함이라기보다는, 나무에 달린 도토리나 조개가 품고 있는 진주 같은, 작지만 생명력 있고 단단한 것들. 귀히 쓰이면서 소중하게 대하게 되는 단단함이다.

아동복 광고모델을 시작한 다섯 살부터 27년간 배우 생활을 해온 박은빈은 팔색조의 면모로 오랜 기간 안방극장의 흥행보증수표였다. 예민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한 남장 여자 군왕 이휘(KBS2) '연모', 조용하면서도 강단있는 모범생 송아(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열정 가득한 야구구단의 최연소 운영팀장 세영(SBS '스토브리그'), 트라우마를 지닌 음란마귀 능청꾼 대학생 지원(JTBC '청춘시대' 1,2)까지. 고착화 되지 않은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꾸준하게 쌓아올렸다.



박은빈의 미덕은 비단 연기력만은 아니다. 매번 새로운 얼굴을 형상화했던 도전 정신과 성실함. 대학생 시절 복수전공을 하느라 쉰 한해 빼곤 데뷔 이래 매해 작품을 찍어왔다던 그다. 이러한 부지런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연기 내공과 대중의 오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 그는 이 성실함과 진중함으로 또 한번 인생작이라 할 만한 드라마를 대중 앞에 내놓았다. 신드롬급 열풍을 일으키며 최근 종영한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연출 유인식, 극본 문지희)다.

박은빈은 이 드라마에서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지닌 신입 변호사 우영우를 연기했다. 목소리 톤부터 손짓, 걸음걸이, 눈빛 등 캐릭터와 완벽하게 물아일체된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와 더불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으로 안방극장에 따뜻한 감동과 유쾌한 웃음, 순수한 설렘을 함께 불어넣으며 햇살 같은 힐링을 선사했다. 자폐인이라는 자칫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있는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었지만, 박은빈은 오히려 이 역할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진하게 증명했다.



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
ENA에 박은빈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SNS 짤이 돌아다닐 만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인기가 대단했어요.

"사실 작품성 측면에서는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긴 했지만 대중성에 있어서는 얼마나 호응해 주실지는 미지수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건 순전히 방송이 나간 후의 대중의 몫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대를 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초반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주셔서 배우로서는 살짝 무섭기도 했어요. 내부적으로 신생 채널이다보니 시청률 3%만 나와도 대박이라고 예상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훌쩍 뛰어넘는 추이와 함께 많은 분들의 호응 덕분에 감사하면서도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자폐인을 연기한다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듯해요. 실제 대본을 받고 고민을 많이 한 것으로 들었는데요.

"비난과 비판에 설 수밖에 없는 게 배우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대본을 보면서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배우로서 그 연기를 감당해내기에는 자신이 없었어요.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캐릭터라고 느꼈어요. 그랬기 때문에 너무 어려웠던 작품이었어요. 감독님과 작가님이 저를 믿어주시는 것과는 별개로 주저함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들을 감독님과 작가님을 만나서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면서 위선적으로 이 역할을 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두 분께서 신중을 기하는 제 모습이 이 드라마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해주시더라고요. 누군가 꼭 해야되는 이야기라면 제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진중하게 연기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저는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은 욕심이 컸어요. 우영우라는 캐릭터가 자폐인들의 대표격이 될 수도 없고 대변하는 인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우영우를 제외한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확신을 얻기까지가 어려웠어요."

어떤 접근으로 우영우라는 인물을 연기 하고자 했나요?

"드라마가 에피소드 형식이다 보니 매주 내용이 확확 바뀌는게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이목을 끌어야한다는 점에서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드라마를 보게 하려면 우영우 역할을 맡은 제가 잘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 대사에서도 이야기했듯 '이상하고도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 우영우를 애착해 주시기를 바랐어요. 저의 가장 큰 숙제가 시청자 분들을 우영우 편으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많은 분들이 봐주신 만큼 여러 반응이 있겠지만 우영우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걸 좀 더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에 캐릭터로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임했어요."

자폐인을 연기하기 위해 따로 준비하거나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 있었나요?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많은 것을 체험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겠지만 사실상 '연모' 촬영을 끝내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돌아서 가기보다는 독자적으로 고유성이 있게 정면돌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모방하는 레퍼런스를 최우선으로 배제하기도 했고요. 그분들을 절대 수단으로 삼아서 연기하면 안 된다는 배우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느껴서 그 부분도 가장 조심했어요. 그저 우영우의 세계관 속에서 '어딘가 우영우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초점을 맞추면서 연기하고자 했어요."

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박은빈, 사진제공=나무엑터스
극중에서 대사량이 엄청났어요.

"나름 대사를 잘 외우는 편이라고 자부했음에도 많이 어려웠어요. 작가님, 감독님, 자문 교수님 다 반신반의했던 것 같아요. 우영우 톤으로 이 많은 대사를 어떻게 전달할 지에 대해 걱정을 해주시긴 했어요. 하지만 결국엔 저 혼자 해내야하는 일이었죠. 부딪혀보니 '어 이게 되네?' 하면서 점점 대사가 많아지는 것 같았어요. 13, 14회 제주도 신이 법률 지식에 고래 이야기까지 카테고리가 얽히면서 뒤로 갈수록 대사가 더 많아졌거든요. 결코 쉽지 않았죠."

작품 선택에 있어 배우로서 선한 영향력을 함께 고려하는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자극의 정도를 기준 삼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나쁜 영향력보다는 선향 영향력을 끼치는 쪽이 미디어에 속한 사람으로서 윤리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가 도덕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또 누군가는 인생 드라마라고 하실 수 있을 만한 좋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배우 박은빈으로서 이렇게 오랜 기간 주연배우로 활약하면서 사랑 받아온 이유를 꼽아보자면요?

"꾸준함이요. 제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학교를 다니느라 2015년을 제외하곤 1996년도에 데뷔한 이래로 한 해도 쉬지 않았다는 게 저의 자부심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쉬지 않고 이런 저런 역할들을 경험했고, 많은 작품을 통해 학습을 했어요. 성공 요인은 성실함과 인내심 덕분 같아요. 언젠가 연기를 하면서 상처입는 날이 오면, 미련없이 떠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던 것이 힘이 된 것 같아요.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

롱런해온 만큼 나름의 연기 철칙이 있을까요?

"연기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게 진정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불편함이 있을거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에 임하는 제 의도만큼은 추호도 그런 여지가 없게끔 진심을 담아서 연기하고 싶었어요. 배우로서는 그동안 해온 것처럼, 어제 살았던처럼 오늘을 살며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같아요."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벌써부터 높아요.

"이 작품을 하기까지 여러 고민을 했듯이 후속작을 하는 건 그 이상의 결심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영우를 최대한 애정하면서 포장해놓은 상황인데 그 포장을 열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또 선물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더 크게 고민이 들 것 같아요."

박은빈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란?

"도전의 두려움을 맞서게 해준 작품이에요. 영우한테서 배운 게 많아요. 영우가 저보다 더 어른답다고 느꼈어요. 영우는 어른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고 자신의 영향력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 영향력을 좋은데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영우의 씩씩한 용기가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우가 낯설고 불편한 걸 뛰어넘어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결심한 장면 역시 저를 일깨워준 마법의 주문 같았어요. 앞으로 선택에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에 영우를 떠올릴 것 같아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