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tvN
열여덟 살에 문과 장원을 석권했으나 모친을 병으로 여의고 의학으로 진로를 돌려 내의원까지 입성한 천재 의원 유세엽(김민재). 내의원 수석 침의까지 올라 ‘신침’이라 불렸으나 왕의 얼굴에 난 종창을 치료하다 출혈이 멎지 않고 왕이 승하하면서 그의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도제조였던 부친은 왕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려 했으나 목숨을 잃었고, 유세엽은 왕이 된 세자의 배려에 의해 목숨만 겨우 건져 문외출송(죄인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에 처해진다. 절망에 빠진 그가 자포자기 상태로 절벽 앞에 서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정도다. 그런 그를 막아선 존재가 소락현 현령의 딸 서은우(김향기)다. 은우는 세엽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살아야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의원님은 꺾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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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잃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유세엽을 비롯해 서은우와 계수의원 사람들, 그리고 계수의원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과 아픔이 있다. 특히 불평등과 불공정이 일상화된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이들은 취약계층이다. 오랑캐에 끌려간 피해자임에도 환향녀라 손가락질 받는 할망이나 결혼해서 남편을 잡아먹었다며 구박을 받는 은우, 구미호라 의심받으며 살인 용의자가 된 백정의 딸 연희(강지우), 살인 현장에 쓰러져 있었다는 이유로 단번에 참수될 위기에 놓인 세엽의 몸종 만복(안창환) 등은 여성과 천민이라는 굴레로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쉽사리 불행에 빠지게 된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이러한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하며 돌보는 과정을 그려내며 마음에 몽글몽글한 감정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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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의술을 다루는 메디컬 사극이었던 ‘허준’ ‘태양인 이제마’ ‘대장금’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내세우며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지만 ‘정신과’에 방점이 찍힌 만큼 기본적으로 힐링 드라마의 성격을 지닌다. 유세엽이 본명 대신 세엽을 아들처럼 여겨 할망이 부르는 ‘풍’이란 이름을 따서 유세풍이란 이름을 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여기에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헤쳐 나가면서 조선시대판 셜록과 왓슨처럼 유세풍과 서은우가 활약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일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범죄 수사극 ‘별순검’ 시리즈 같은 느낌도 자아낸다. 유세풍을 트라우마에 빠트리고 모든 것을 잃게 한 선왕의 죽음에 얽힌 비밀도 풀어내야 하니 이런 장르의 혼용은 드라마 내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12부작 예정에 시즌제 드라마를 선언한 만큼 4화까지 방영한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이 나아갈 길은 한참 남았다. 다만 삭막하기 그지없는 시대에 ‘먼치킨’ 같은 천재 의원의 성장담에 그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행복을 찾는다는 이 드라마의 설정은 작은 위안이 된다. 사람은 언제든 절망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누구든 유세엽이나 서은우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을 때가 있고, 연희나 만복이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빠질 수 있다. 그럴 땐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다. 유세엽이 유세풍이 되어 살아가고, 은우가 청성 이씨 집안 종부에서 여의(女醫)로 살기로 결심하는 데는 서로를 포함해 계수의원 사람들 등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것이 구침지희 같은 화려한 의술이 없어도 이 드라마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