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교육[기고]

머니투데이 양영은 M발레단 단장 2022.08.1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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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교육[기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 30여명이 열을 맞춰 4줄로 서 있다. 조회시간을 생각나게 하는 순간이지만, 이내 익숙한 음악이 들려온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기사들의 춤'이다. 아이들은 웅장한 전주에 맞춰 기사가 된 듯 '2줄 대 2줄'로 근엄하게 서로를 마주본다. 마치 몬테규 가문과 캐퓰렛 가문의 대치를 보는 듯하다. 한쪽 편 아이들이 다른쪽 아이들을 향해 한 팔을 들어올려 우에서 좌로 묵직하게 훑는다. 다른쪽 편 아이들은 상대의 공격을 느끼듯 상체를 뒤로 구부리며 영화<매트릭스>의 한 장면과 같은 동작을 선보인다. 이렇게 양쪽은 서로의 동작을 번갈아 반복하며 대립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어지는 프리스타일의 칼싸움 동작, 그리고 웅장하게 끝을 맺는 마지막 4개의 음에 맞춰 한줄씩 장렬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아이들. 이 짧은 시간동안 아이들은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요장면을 한꺼번에 모아 보여줬다.



영국 남동부 에식스 카운티에 있는 아서 버글러(Arthur Bugler) 라는 초등학교 강당에서 이뤄진 수업 장면이다. 이 수업은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가 구축한 '러닝 플랫폼(Learning Platform)'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다. 로얄오페라하우스는 발레와 오페라를 초·중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플랫폼을 구축했다. 일반학교 교사들은 발레나 오페라에 대해 사전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더라도 단계·주제별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활용해 예술교육수업을 설계할 수 있다.

교사들은 디지털플렛폼을 통해 기본 모티브를 배우고 이를 학생들과 함께 탐구하며 자신들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성시킨다. 이렇게 기본을 공유하며 수많은 학교에서 수많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한다. 서로 약속된 규칙은 있으나 '맞고 틀림'은 없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아이들은 함께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간다.



이는 아마도 무용교육이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한다. 무용교육은 학습자 각자의 신체운동능력을 향상시키기도 하지만, 주로 다수의 학습자들이 모여 약속한 동작과 표정을 음악과 동선에 맞춰 행하는 것을 연습한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 공간적인 배려와 시간적인 약속, 그리고 감정을 공유하며 개인의 성취감을 넘은 공동의 성취감을 갖게 된다. 감출수 없는 아이들의 만족감이 관련 인터뷰영상을 통해 새어나온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며 시작한 프로젝트의 끝자락에서 아이들은 이미 온몸 가득 자신감에 차 있다.

예술단체가 자신들의 인프라와 자원을 활용해 직접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실천함으로써 일반인이 일생동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특수한 전문적 예술환경을 당장 내일이라도 학교 교실에서 만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는 사례다.

우리나라도 전문 예술 환경은 영국 못지 않게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를 활용해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워내는 일반과 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연계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문예술환경이 교실 안에서 재현될 수 있게,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에 우리 교육 당국자들도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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