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계에서는 반도체산업이 국가간 경제안보전략의 핵심이자 투자·일자리 창출 방안의 주도업종으로 부상하면서 삼성전자를 사이에 둔 한미간 물밑 수싸움이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삼성전자가 지난 5월 말 텍사스주정부에 제출한 세제혜택 신청서에는 이와 별도로 오스틴 공장 부지에 245억달러(약 32조원)를 투자해 공장 2곳을, 테일러 공장 부지에 1676억달러(약 220조원)를 들여 9곳을 추가 건설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34년 전후로 완공해 가동하고 나머지는 이후 10년에 걸쳐 가동한다는 방안이다.
삼성전자가 이 같은 계획안을 제출한 것은 텍사스주가 지역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기업에 10년 동안 재산세 감면 혜택을 제공하는 챕터 313 세금 프로그램이 올해 말 만료되는 데 따른 조치다.
세제 혜택 만료를 앞두고 삼성전자 외에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네덜란드 반도체업체 NXP,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도 인센티브를 미리 확보해두기 위해 당국이 신청기한으로 고시한 지난 6월1일까지 투자 계획을 최대치로 가정해 신청서를 제출했다.
업계 관계자는 "오스틴과 테일러의 삼성전자 부지에 현재 기술 수준에서 반도체 공장을 가장 많이 지을 경우 각각 2곳과 9곳을 추가할 수 있다"며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추가 투자에 대비해 인센티브를 미리 확보하는 차원에서 계획안을 최대치로 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쌩큐 삼성" 트윗 데자뷔

당장 그렉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새 공장은 텍사스가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리더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만들 것", "투자를 늘린 데 대해 삼성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환영 성명을 냈다.
2017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의 미국 가전 공장 신설을 압박하면서 올린 "쌩큐 삼성" 트위터 글이 겹치는 대목이다. ☞ 2017년 2월6일 보도 '[기자수첩]프레지던트 리스크' 선빵 맞은 삼성' 참조
미국 현지 언론의 보도 방식도 비슷한 결을 보인다. 이번 사실은 삼성전자가 제출한 세제혜택 신청서를 텍사스주 감사관실이 공개한 뒤 오스틴 지방매체가 보도하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로이터가 다음날 뒤따라 'Samsung Electronics Floats Nearly $200 Billion Spend on New Texas Plants in Next Decades'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미국 정치권과 언론이 삼성전자의 잠정안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투자를 압박하는 느낌을 부인하기 어렵다.
美 반도체 패권주의, 한국의 부담

특히 2000년대 들어 첨예화한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구도에서 반도체는 패권경쟁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상황이다. 바이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첨단기술에서 우위를 장악한 국가가 경제패권과 군사패권을 쥔다는 것은 상식이다. 요새 뜨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로봇, 슈퍼컴퓨터는 민간과 군이 모두 사용하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누가 더 고성능 칩을 쓰느냐에 따라 스텔스 전투기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의 격차가 벌어진다.
외교가 한 인사는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인접한 동아시아, 즉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생산시설이 밀집돼 있는 걸 지정학적 리스크로 판단한다"며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난과 맞물려 바로 이 지점이 바이든 행정부가 얘기하는 경제안보의 핵심 문제"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테일러시 파운드리 공장 신설 결정 역시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삼성전자의 '20년 동안 250조원 미국 현지 추가 투자' 잠정안을 두고 아전인수식 해석과 맞물려 미묘한 시선이 엇갈리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미국이 앞으로 수십년의 글로벌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안보 전략으로 한·미·일·대만의 '칩4 동맹'을 밀어붙일수록 삼성전자가 짊어질 짐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삼성전자의 짐은 또한 어떻게든 대한민국이 짊어져야 할 짐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