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중퇴→늦깎이 공부→필즈상…"저도 먼 길 돌아, 조급해 마세요"

머니투데이 김인한 기자, 박종진 기자 2022.07.06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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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기초과학연구원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기초과학연구원


한국계 미국인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39, June Huh)가 필즈상을 품었다.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IMU)이 4년마다 수학계 난제를 푼 만 40세 미만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수학계 노벨상'이다. 허 교수는 필즈상 86년 역사에서 한국계 최초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IMU는 5일(현지시각) 핀란드 헬싱키에서 세계수학자대회를 열고 허 교수를 포함한 4명의 필즈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필즈상 선정위원회는 허 교수 선정 배경으로 "대수기하학의 도구를 이용해 조합론 문제를 풀어 '기하학적 조합론'을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고 밝혔다.

대수기하학은 도형의 변이나 넓이 등 기하학적 대상을 대수식을 써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조합론은 '경우의 수'를 탐구하는 분야다.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융합해 허 교수는 수학계 난제를 풀었다. 대표적으로 리드 추측과 로타 추측을 해결해 일약 수학계 스타로 떠올랐다.



리드 추측은 1968년 영국 수학자 로널드 리드가 제시한 조합론 문제다. 허 교수는 조합론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대수기하학을 접목해 난제를 풀었다. 그는 1971년 미국 수학자 잔카를로 로타가 제시한 로타 추측 문제도 이처럼 대수기하학적 직관을 바탕으로 해결했다. 평생 난제 하나를 풀기도 어려운데 허 교수는 10여 개를 풀어냈다.

허 교수는 이날 "수학은 저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얼마나 깊이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일"이라며 "저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에 의미 있는 상을 받아 깊은 감사함을 느낀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고교중퇴, 뒤늦은 수학 사랑…늦깎이 천재의 대기만성 결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제공=과학기술정보통신부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제공=과학기술정보통신부
허 교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초·중·고 대학 교육을 모두 한국에서 받은 정통 국내파다. 유수의 수학 천재들이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지만 허 교수는 늦깎이 천재에 가까웠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고교를 자퇴한 뒤 문학서적 읽기에 빠졌다. 그러나 다시금 학업에 집중해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진학했고, 서울대에서 물리천문학과 수학을 복수 전공했다. 두 개 전공을 함께 공부하면서 과목 학점이 낮게 나왔고, 이 때문에 학부를 6년간 다녀야 했다. 허 교수는 대학 생활 6년 중 졸업 1년은 남긴 5년째에 수학에 뒤늦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학부를 마칠 때쯤 서울대에서 초청한 필즈상 수상자 일본의 헤이스케 히로나카 교수 강의를 듣고 수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 연구실에서 대수기하학 연구를 시작했고 2009년 석사를 받았다. 이어 2014년 미국 미시간대 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 취득 전부터 수학계의 오랜 난제를 해결했다. 남들보다 속도는 더뎠지만, 자신만의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 온 끝에 필즈상을 거머쥐었다.

허 교수는 필즈상 수상 직전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저는 먼 길을 돌아서 제 일과 적성을 찾았지만, 돌아보니 그 길이 제게 가장 알맞은 길이었다"며 "목표를 미리 정해두고 생각대로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너무 조급하거나 집착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조금씩 돕는 게 최선"이라며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는 머니투데이와의 일문일답.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조급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면 해요"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국제수학연맹(IMU)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 사진=국제수학연맹(IMU)
-한국 최초 필즈상 수상 소감은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의 조용한 삶이 흔들릴까 걱정되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뜨기도 했습니다. 학계 동료들이 제 기여를 알아주는 일은 언제나 큰 격려가 되지만, 수상하더라도 저의 삶과 공부는 이전과 아주 다르지 않을 거예요.

-수학의 매력이 있다면

▶수학은 과감하면서도 정확하고 깨끗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훈련이에요. 다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관찰할 수 없는 놀이의 형태지요. 원인인지 결과인지, 그 중간의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의 이런 독특한 '취향'과 인간 사회의 놀라운 발전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수학에 빠져든 계기가 있었나

▶20대 중반에 헤이스케 히로나카 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요. 실시간으로 수학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본 느낌을 받았습니다. 악보만 읽던 사람이 처음으로 음악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헤이스케 히로나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고, 헤이스케 히로나카 교수는 특별히 정돈하려 하지 않고 이런저런 수학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한국에 수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수학의 세계에선 어떤 두 사람이 만나더라도 충분한 시간만 들이면 서로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언제든지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제든지 설득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팩트'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지는 시대에 폭넓고 깊이 있는 수학 교육이 신뢰의 재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교 중퇴, 뒤늦은 수학 사랑교수님처럼 속도는 늦었지만 꾸준히 자신만의 방향대로 걷고 있는 독자들에게 한마디

▶저는 먼 길을 돌아서 제 일과 적성을 찾았지만, 돌아서 생각해보니 그 길이 저에게 가장 알맞은 길이었던 듯해요. 목표를 미리 정해두면 마음이 경직되니 생각대로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조급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면 해요.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니까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되 조금씩 도와주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尹대통령도 필즈상 수상 소식에 축전…"선진국 진입 각인"

고교 중퇴→늦깎이 공부→필즈상…"저도 먼 길 돌아, 조급해 마세요"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허 교수에게 축전을 보냈다. 윤 대통령은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이번 필즈상 수상은 수학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각인시켜준 쾌거"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수학을 비롯한 기초과학 분야에 헌신한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결과"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대한민국에서 공부한 젊은 수학자의 수상이라 감격이 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인간 지성의 한계에 도전해 수학의 토대가 확장되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허준이 교수의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드린다"며 "고등과학원과 프린스턴대학 교수인 허준이 교수가 국내외 수학자들과의 활발한 연구 활동을 통해 인류 지성의 지도에서 길을 밝히는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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