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조 '코인 사기꾼' 잡은 형사의 집념…기소서류만 '1.5톤 트럭 2대'

머니투데이 정세진 기자 2022.07.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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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고혁수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폭력계장(경정)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34만건(2019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고혁수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폭력계장(경정) /사진=고혁수 경정 제공고혁수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폭력계장(경정) /사진=고혁수 경정 제공


"당신을 현 시각부로 유사수신 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체포합니다."

지난해 6월 28일 오전, 고혁수 경정이 이끄는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이하 강수대) 소속 형사들이 서울 강남구 사무실 등 3곳을 급습해 브이글로벌 대표 이모씨와 운영진 등 4명을 체포했다.

10개월간 5만여명으로부터 3조8000여억원대 '코인' 사기행각을 벌인 '희대의 사기꾼'이 사로잡힌 순간이었다. 하지만 형사소송법 상 체포 후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으면 피의자를 즉각 석방해야 한다. 검사가 구속영장 청구를 위해 관련 서류를 검토할 시간을 고려하면 피의자를 체포한 순간부터 고 경장과 동료 형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36시간 남짓이다.



이모씨 일당을 풀어주면 증거를 인멸하거나 밀항을 할 수도 있었다. 고 경정과 동료 형사 11명은 이틀간 밤을 새워 피의자 심문과 조사를 거듭한 끝에 법원으로부터 이들 일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 받았다.

10개월만에 피해자 5만여명·피해금 3조8500억원…"기간 대비 피해금은 조희팔 능가"
경기남부청 강수대 수사팀은 지난해 2월 첩보를 받고 4개월간 수사를 벌였다.



통상 경찰은 수사에 나서면 형사소송법 원칙에 따라 수사 대상의 동의를 받아 임의수사를 진행한다. 조사과정에서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진술을 확보하면 피의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브이글로벌 대표 일당도 경찰 수사가 시작된 후 사후 구속영장 신청을 예상해 관련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사팀이 브이글로벌 사건을 인지했을 땐 이미 피해 상황이 심각했다. 피해자 중에는 '가상화폐에 투자하면 최소투자금 600만원을 입금하면 수개월 내로 원금의 3배 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에 속아 가족과 지인 명의로 6억여원을 투자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 일당의 입금계좌를 통해 하루에만 1만 건의 입출금이 이뤄지고 있었다.

경찰은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꾼이라 불리는 조희팔이 다단계 유사수신업체를 운영하며 7년간 5조원대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체포 당시 이모 대표를 포함한 브이글로벌 일당은 10개월간 피해자 5만여명으로부터 2조원이 넘는 투자금을 모은 것으로 파악됐다. 범죄 기간을 고려할 때 브이글로벌 사건은 피해액이 조희팔 사건을 능가하는 범죄인 셈이다.


고 경정과 수사팀은 이모 대표 등을 구속한 후 1년간의 수사를 통해 총 70여명을 검거하고 18명을 구속했다. 경찰이 브이글로벌 일당을 검찰에 기소하면서 제출한 서류만 36여만 페이지, 1.5톤(t) 트럭 두대 분량이었다. 추가수사를 통해 1심 재판 당시 검찰이 파악한 브이글로벌 사건의 총 피해액은 3조 8500억원에 달한다.

법원은 지난 1월 이모 브이글로벌 대표에게 1심에서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고 경정과 경기남부청 강수대 수사팀 소속 11명의 형사들이 1년 동안 사실상 하루도 못 쉰 채 수사한 결과였다.

유사수신부터 연쇄살인범·토막살인에 조폭까지…대한민국 1등 형사
고 경정은 20년차 '형사'다.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형사는 법률용어가 아니다. 경찰 내 직급이나 직책에도 형사는 없다. 일선 현장에선 오랫동안 형사과 소속 수사관을 형사라고 불렀다.

그는 형사가 되고 싶어 경찰이 됐다. 고 경정은 "형사를 하는 사람들은 형사의 매력을 느낀다"며 "대부분이 직업적 사명감을 느끼고 있고 분석적인 성격에 집중력과 끈기를 기본으로 하고 범인과 줄다기리를 하려는 승부욕도 좀 있는 편"이라고 했다. 지난해엔 1년간 수사 끝에 경기 수원·안양·성남의 3개 조직소속 폭력배 92명을 일망타진하기도 했다.

고혁수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폭력계장(경정)/사진=고혁수 경정 제공고혁수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폭력계장(경정)/사진=고혁수 경정 제공
20년 경찰 생활 중 17년을 형사로 지낸 그가 수갑을 채운 범죄자는 조직폭력배부터 연쇄살인범, 토막살인범, 부실시공업자까지 다양하다. 2008년 경기 서남부지역에서 8명의 부녀자를 연쇄살인한 강호순을 검거할 때도 고 경정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고 경정은 2008년 11월 19일 강씨가 수원에서 7번째 피해자 A씨를 납치해 안산의 야산에 암매장하기까지 이동한 경로를 주변 CCTV(폐쇄회로)를 확보해 밝혀냈다. A씨의 범죄에서 꼬리가 잡힌 강씨는 이듬해 1월 경찰에 붙잡혔다.

2014년 수원에서 동거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박춘풍을 검거할 때도 고 경정의 수사노하우가 발휘됐다. 중국인인 박씨는 2008년 위조여권을 이용해 입국했다. 사건 발생 후 수사에 나선 경찰은 박씨의 인상착의를 확보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해 이동경로와 통신기록만 확보했을 뿐이다. 잠복 중인 형사 눈앞에 박씨가 나타나도 그가 살인범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고 경정은 박씨 통화 기록 중 02, 031 등 유선번호 목록을 추렸다. 이들 유선번호가 등록된 주소지를 조사해 CCTV가 설치된 건물을 찾아냈다. 고 경정이 CCTV에서 박씨의 얼굴을 확보해 수사팀에게 공유한 지 10분만에 박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통해 박씨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덕분이다.

이같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고 경정은 수사경력 10년 이상 수사관에게 시험기회가 주어지는 제3회 책임수사관시험에서 형사분야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밤샘수사'달고 사는 형사들…"후배들에게 더 나은 수사여건 만들어주고파"
고 경정은 일선 형사들이 부족한 인력과 예산을 사명감으로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열정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수많은 형사가 있다"며 "범죄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검거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자신감의 바탕에는 형사들의 헌신이 있다. 그는 "형사는 밤새는 걸 달고 산다"며 "(형사는) 오늘 비번이라도 추적을 안 하면 범인이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정해진 근무시간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형사는 명절에도 쉬기 어렵다. 2013년에는 추석연휴를 3일 앞두고 경기 하남의 한 변전소 인근에서 여고생 변사체가 발견된 적도 있다. 고 경정과 형사들은 추석연휴를 반납했다. CCTV 저장기간이 지나 증거가 사라질 수 있어서다. 현장서 100m쯤 떨어진 버스정류장을 지나간 버스 블랙박스를 분석해서 사건추정 시간에 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성 1명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 이 남성을 추적하기 위해 경기 하남에서 서울 송파구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경로에 있는 CCTV 확보했다. 2주간의 추적과 잠복 끝에 범인을 잡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 경정은 '형사의 부인도 반은 형사'라고 했다.

고 경정의 꿈은 후배들에게 더 나은 수사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는 "경찰 수사 역량이 국민들에게 충분히 공감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수사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며 "인력과 예산에서도 후배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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