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엔저 속 딜레마 빠진 일본 경제…"서서히 침몰할 것"

머니투데이 김상희 기자, 최성근 전문위원 2022.06.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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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모닝 키플랫폼] 글로벌 스캐너 #3 - "슈퍼 엔저와 일본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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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엔저 속 딜레마 빠진 일본 경제…"서서히 침몰할 것"


최근 일본 엔화 환율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 2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은 136.6엔 수준까지 하락해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24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가파른 엔저 여파로 국내 소비자 부담이 커지자 일본 내부에서는 '나쁜 엔저'라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의 4월 엔화 기준 수입 물가는 43.3% 올랐고, 소비자 물가도 2.1% 올랐다. 물가 상승률이 8% 대인 미국에 비하면 미약해 보이지만 상황이 다르다. '잃어버린 30년'간 물가 상승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본으로선 '슈퍼 엔저'로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향후에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미국과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행보가 지속될 전망이어서 일각에서는 연내 엔화가 달러당 150엔 수준까지 약세를 나타낼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슈퍼 엔저 속 딜레마 빠진 일본 경제…"서서히 침몰할 것"
안전자산 엔화의 굴욕?…"금리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일본 경제의 딜레마"
통상 엔화는 글로벌 경제의 위기감이 불거질 때마다 금이나 미국 달러, 스위스 프랑과 함께 소위 '안전자산'으로 취급돼 매입 수요가 늘고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약 357조 엔 규모에 달하는 해외자산의 각종 배당이나 이자수입 등으로 벌어들이는 연간 약 20조 엔의 탄탄한 소득수지로 인해 투자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디폴트 위기, 스태그플레이션 등 시장의 불확실성이 고조되자 엔화 가치는 기존 상식과는 반대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특히 현재 외환시장에서 급격한 엔화 약세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미국과 일본의 벌어진 금리 차이가 꼽힌다. 미 연준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지난 5월 0.5% 포인트 인상에 이어 지난 15일 0.75%을 인상하는 소위 '자이언트 스텝'을 취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오는 7월 기준금리를 0.25% 인상하고 9월에는 빅스텝을 취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나온다.


반면 일본중앙은행(BOJ)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나 홀로 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021년 기준 BOJ는 약 530조 엔의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94%가 10년물 국채다. 만약 BOJ가 금리를 올리거나 지정가 오퍼레이션(국채금리 0.25% 초과 시 무제한 매입하는 공개시작 조작)의 금리 상한을 인상할 경우 국채가격 급락으로 대규모 평가손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각종 금융기관들과 외국계 은행들이 보유한 일본 국채까지 평가절하될 경우 일본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져들 수 있다. BOJ가 2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엔화 가치가 급락해도 무제한 국채 매입으로 국채 금리를 0%대로 통제하려는 이유다.

또 금리가 상승할 경우 막대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재정도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해 기준 일본 정부의 국채 잔액은 최초로 1000조 엔(약 9580조 원)을 넘어섰고,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56%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정부의 원리금 상환 부담은 커지고 그에 따른 재정 지출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엔저를 용인해 온 이유는 수출경쟁력을 확보해 기업 이익이 높아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수출 기업들의 이익이 증가하면 투자와 고용도 늘고 소비와 정부의 세수도 덩달아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과거의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토요타와 같은 대기업은 생산 거점과 연구 시설을 미국 등 해외로 대부분 이전해 엔저로 수출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혜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일본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내수 비중이 크다. 2019년 기준 일본 GDP 대비 내수(민간 소비+투자) 비중은 80%이지만 수출은 19%에 불과하다. 글로벌 교역에서 일본의 수출 점유율도 1998년 7%에서 2021년 3.4%로 줄었다. 반면 제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1998년 10%에서 2020년 24% 수준으로 2배 이상 늘었다.

결국 무제한 양적완화를 통해 유발된 엔저 속에서 경기부양에만 급급했던 BOJ는 금리를 유지하기도 어렵고, 금리를 올리기는 더욱 어려운 딜레마에 빠져있다.

슈퍼 엔저 속 딜레마 빠진 일본 경제…"서서히 침몰할 것"
일본 경제, 구멍난 배처럼 가라앉고 있어
일본 엔화의 가치가 이렇게 하락한 것은 금융시장이나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와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중첩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디지털 전환 실패로 일본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했다. 1988년 세계 시총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1990년대에도 소니, 히타치, 파나소닉, 후지츠, 닌텐도, 샤프 등의 일본 IT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2022년 현재 세계 시총 100위권 내에 일본 기업은 토요타 한 곳뿐이며 IT 기업 소니는 114위로 밀려났다.

오랫동안 일본 경제를 관찰해 온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머니투데이에 "일본 기업의 의사결정은 오너 중심이 아닌 이사회 중심으로 이뤄진다"며 "반도체 산업만 해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데 이사회의 만장일치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하려다 보니 투자가 적기에 이뤄질 수가 없고, 산업 전반에 퍼져있는 이러한 거버넌스 문제로 일본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는 계속 지연되거나 뒤처져 왔다"고 말했다.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구조의 변화가 일본 경제의 쇠락을 낳고 결국 엔화의 국제적 지위가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분석도 있다.

2021년 기준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층의 비율은 29.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연금 또는 자본소득 등에 의존해 살아가는 고령층의 소비 여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금리가 인하되고 양적완화가 이뤄져도 일본 고령층은 소비와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 반대로 엔저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 상황이 되면 장래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 매는 선택을 하게 된다.

물론 일본 경제와 산업이 당장 엔저로 망하거나 엔화의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일본 경제는 여전히 세계 3위 수준이며 세계 최대 규모의 대외자산을 지니고 있다. 인구 1억 2000만 명에 1인당 GDP는 4만 달러 수준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일본 경제 전망에 대해 "마치 조그만 구멍이 난 커다란 배와 같다"며 "혁신도 없고 디지털 전환마저 실패한 일본 경제는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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