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멈춰선 채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들./사진=함께 웃고 있는 남형도 기자
"그래요? 근데 그거 왠지 저한테 하는 얘기인 것 같은데요."(기자)
"그럼 혹시… 파리가 영준이한테 간 거 아니에요?"(기자)
영준이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면서도 "푸하하"하고 또 웃었다. 치아까지 보이는 함박웃음이 마냥 좋았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내게 낯을 가리던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전 내내 함께 뛰논 덕분인지, 얼굴은 발그레 상기돼 있고 머리는 땀에 젖어 촉촉해진 채로.
놀 곳 부족한, 가파른 골목 마을…맘껏 뛰놀라고 만든 '이바구 놀이터'
부산 동구에 사는 아이들에게 물어본, 집 주변 골목에 대한 인상. 놀이터가 없고, 곳곳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부산종합사회복지관
"그래도 놀만 한 데 가려면, 버스로 20분은 가야 해요." 여기 사는 수혁(가명)이 어머니가 그리 말했다.
그게 속상했던, 열정적인 부산종합사회복지관(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한 달에 한 번,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게 '이바구(이야기, 경상도 사투리) 놀이터'란 걸 만들었다. 부산 동구에 사는 7~12세 아동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그 안에 재밌는 각종 놀이와 맛있는 점심, 간식, 선생님들의 애정 등을 잔뜩 담았다. 2020년 6월부터 해왔는데, 이달엔 주말 이틀 동안 약 120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았다.
언뜻 들어도 참 좋은데, 실제 아이들과 학부모들 만족도도 높단다. 그런데 그런 '이바구 놀이터'가 없어질 위기란다. 그래서 주저 없이 부산에 왔다. 대체 누가 이 좋은 걸 없앤단 말인가(화르르, 뒤에서 계속).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그 가치를 오롯이 잘 기록해 전해야겠다 싶었다.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금세 가득찬 '돌고래 함성'
어서와, 얘들아. 오늘 날도 좋고 재밌게 놀자./사진=물개 박수 치는 남형도 기자
이무진의 '신호등' 노래가 복지관 앞에서 울렸다. 날이 좋아 더 설레었다. 엄마, 아빠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벌써 신나 있었다. 쪼그만 가방과 모자를 쓰고, 뛰지 말래도 얼마나 좋아하던지. 지나가던 할아버지도 "놀러 가는 거야?"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복지관 선생님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 걸음마다 박수를 짝짝짝, 환호해줬다.
모두 네 개의 조, 이날 참여한 어린이는 54명. 나도 1조에 하루를 함께할 선생님으로 꼈다. 5층 강당에 가니 벌써 공을 튀기고, 신나서 뛰어다니고 난리가 났다. 유치원에 다니는 7살 아이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모두 15명이었다.
각 조엔 '놀이대장'이 있는데, 우리 조는 재기발랄한 남재동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플레이리더 최승우 선생님(열심 담당)과 대학생 서포터즈인 안상희(활기참 담당), 황희윤(피곤함 담당), 우승재 선생님(해결사 담당)도 함께했다. 아이가 54명인데 함께하는 선생님이 36명이라 놀이는 물론 안전, 방역까지 확실히 챙긴다.
아이들이 직접 한, '나만의 썬캡' 만들기. 귀엽게 잘 꾸몄다./사진=남형도 기자
얘들아, 정말 뛰고 싶었구나
차 조심, 구봉산 치유의 숲으로 놀러 가는 길./사진=지나가는 차마다 레이저를 쏘는 남형도 기자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은우(가명)는 가는 길 내내 장난을 쳤다. "합기도에서 찍어 차기는 이렇게 해요"하며 내게 발차기 시범을 보여줬다. 3개월만 있으면 검은 띠를 딴다며. 또 스스로 "노란 선은 넘으면 안 돼요"하더니 "오, 넘었다! 넘었다!"하며 까르르 웃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이렇게 매달리고 놀던 아이들./사진=남형도 기자
놀이 시작 전이니 쉬라는 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열정적으로 놀았다. 나도 아이들과 운동 기구에 매달리며 놀았다. "하나, 둘, 셋." "와아아아, 꺄아악, 오오오." 숨이 헉헉 나왔고 몸이 기분 좋게 달아올랐다.
무궁화 꽃 피우고, 줄다리기에 숨바꼭질…아이들의 '찐웃음'
작대기를 피하는 단순한 놀이 하나에도 이렇게 즐겁게 뛰어다녔다./사진=남형도 기자
줄다리기도 했다. 1~3학년과 4~6학년이 붙었다. 서로 잘 모르던 아이들이 나란히 붙어 서서 영차, 영차 힘을 합쳐 당겼다. 선생님 대(VS) 아이들로 대망의 마지막 시합을 했다. 시작하기 전엔 "우리 져 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했는데 웬걸,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이 가뿐하게 끌어당겨 이겼다. 진짜 힘이 셌다. 아이들은 "와아아"하고 함성을 질렀다.
잠시 휴식하고(그런데 애들 진짜 안 쉼), 한 줄로 서서 공 넘기기 놀이를 했다. 앞에서 뒤로, 발 사이로 공을 넘긴 뒤 마지막 아이가 앞으로 뛰어서 가져오는 거였다. 1, 2조와 3, 4조가 붙었다. 공을 넘긴 아이들은 같은 팀 친구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다. 그다음엔 팔을 들어 공을 넘기는 걸 했는데, 키가 작은 유치원생 친구들을 언니, 오빠들이 도와주었다. 그걸 배우는 모습도 좋았다.
자그마한 아이들 옆에 낀 올해 마흔 살된 아저씨./사진=그게 접니다라고 웃고 있는 남형도 기자
"출바알! 출발이라고 하는데 움직였어요, 탈락! 어어어, 웃으면 탈락이에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숨바꼭질'까지, 아이들과 쉴 새 없이 알차게 뛰놀았다. 한껏 뛰고, 긴장한 채 멈춰서고, 그러다 걸려서 탈락해도 즐겁고, 꼭꼭 숨었다가 걸려서 바깥으로 나와도 즐거웠다. 그냥 놀이는 그 자체로, 하는 내내 즐거운 거였다. 아이들의 진짜 웃음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밥풀 튀길 정도로, 즐거웠던 대화
얘들아, 돈가스 김밥 맛있었지?/사진=남형도 기자
"쌤, 근데 여친 있어요?"(은우)
"여친? 아, 어렵네요. 여친은 없는데(아내는 있고요)."(기자)
"에에이, 거짓말치지 마세요. 집에 거짓말 탐지기 있어요! 지이이잉, 이렇게 걸려요!"(은우)
"하하, 이거 큰일이네요. 그거 무서운데요."(기자)
"근데 있잖아요. 선생님도 게임 하세요?"(민하)
"음, 예전엔 많이 했었는데 다 끊었어요. 나이가 너무 들어서 할 수가 없어요."(기자)
"왜요? 그러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허락을 받든지, 새벽에 몰래 하면 돼요! 으흐흐."(민하)
"오, 그러다 걸리면 어떡해요?"(기자)
"걸리면 죽죠! 전에 한 번 할머니, 할아버지 잘 때 유튜브 영상보다 소리가 확 커진 거예요. '이거 무슨 소리야아', 할머니한테 걸려서 엄청 혼났어요. 하하."(민하)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아이들은 서로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부쩍 친해져 있었다. 그랬었지, 놀면서 친해졌었다. 서로 무슨 아이스크림 좋아하냐고 묻고, 생일에 뭐 하냐고, 무슨 치킨 좋아하냐고 묻는다. 서로 가르쳐주기도 했다. "너 다 먹었으면 잘 치워야 해."
열심히 먹고, 말하던 아이의 밥풀이 내 시계에 날아와 붙었다. 그걸 다른 아이가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 묻는다. "쌤, 괜차나요? 많이 놀라쬬?"
처음 불러본 "아기상어, 뚜루루루"
유연하니 자유자재로 림보를 넘어가던 아이들./사진=나였으면 허리디스크다라고 생각한 남형도 기자
이번엔 '두근두근 부스 놀이'. 각각의 부스마다 다양한 놀이가 준비되었다. 기다랗게 붙인 테이프 사이사이를 통과하기, 알까기, 자루 던져서 구멍에 넣기, 가위바위보, 종이비행기 던지기, 컵 쌓기, 림보, 물병 던져 세우기, 노래 부르기 등등. 참가만 해도 칩 하나를 받고, 잘하면 두 개를 받을 수 있었다.
쉬면서도 누워서도 놀아요, 하늘 바라보기 놀이./사진=남형도 기자
아이들은 분주하게 뛰며 놀고, 열심히 모은 칩을 과자, 음료, 장난감이 가득한 숲속 매점에서 썼다. 이 역시 경제 관념까지 키우는 거란다. 그걸 모아 동생 선물까지 사가는 마음 예쁜 아이들도 있다. 그걸 보는 엄마, 아빠들도 마냥 흐뭇하단다.
나도 아이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 부르기에 참여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아기상어' 노래를 열심히 불러봤다. "아기상어 뚜루루 뚜루, 귀여운 뚜루루 뚜루…." 만만하게 봤는데 박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혀가 입안에서 트위스트를 추듯 꼬였다.
8시간을 놀고도, 지친 기색이 없던 아이들
실내에서도 놀고요. 몬스터가 되어 도망치는 놀이./사진=남형도 기자
쉬는 시간 중간엔 부쩍 나의 직업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남 놀이대장님이 "유퀴즈에 나온 기자님이야"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면서부터였다. 직업을 한 번 맞춰보라 하니 온갖 이야기를 다 쏟아냈다. 괜히 물었다 싶었다.
"유재석 돕는 사람!"(아니야)
"초록우산에서 일하는 사람이요!"(땡)
"백수요, 얘가 백수라는데요!"(뭐라…)
"못 생긴 사람!(이 녀석이)
"탈옥수요!"(하하하)
"귀멸의 칼날 혈귀요!"(하하하하)
실내에선 함께 피구를 했다. 피구는 진리다. 우리 때는 통키가 유행이었다. 거기 나온 초등학생들은 건물 높이만큼 점프를 하고, 피구공을 스펀지처럼 누르는 범초등학생이었다. 손 끝에서 불꽃을 쏴라./사진=추억 돋는 남형도 기자
8시간을 넘게 놀다니. 기력이 다해 기절할 것 같은데 이 어린이들은 멀쩡했다. 정말, 정말로 많이 놀고 싶었구나 싶었다.
친구들 모이기도 힘들고, 놀 곳도 마땅찮은 아이들
내게 팔씨름을 하자며 찾아온 아이. 차마 이길 수 없어 힘쓰다가 져줬다. 만족한 표정이었다./사진=아빠 웃음 지은 남형도 기자
일단 부산 동구에 놀 곳이 마땅찮다고 했다. 골목길, 계단길이 많고 좁아서다. 특히나 부산 안에서도 구별로 편차가 엄청 심하다. 조윤영 부산종합사회복지관(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관장은 "연제구엔 놀이시설, 키즈카페가 54곳이 있는데, 우리 동구엔 키즈카페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학부모들 말도 그랬다.
"차를 타고 작정하고 나가야 공원이 있고요. 구청 앞에 작은 터에서 그나마 놀았는데, 보건소 붙어 있어서 그마저도 못 갔고요. 갈 데가 없어요. 아이들이 안쓰럽지요."(민우(가명) 어머니)
"놀 곳이 없어요. 그나마 공원 정도인데 차로 10분 정도는 보호자와 같이 움직여야 하고요. 친구들하고 놀 공간이 없는 거죠. 맞벌이여서 평일엔 아이들 케어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고요. 코로나19 때문에 더 그랬지요."(영호(가명) 어머니)
그러니 아이들이 집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 속상하다고 했다. 대부분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 영상을 본다. 친구들에게 모이자고 해서, 모일 수 있는 여건도 안 된다.
"급체해도 와서 놀겠다고"…아이들이 그리 기다리고 좋아해
어떤 놀이에선 자연스레 협동심을 기르기도 한다. 공을 뒤로 넘기는 아이들./사진=남형도 기자
"집에만 있으면 시들시들한 느낌인데, 몸으로 신나게 놀고 오니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진짜 재밌었다고, 최고였다고, '나 이바구 놀이터 간다'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일기장에 막 쓰고 그래요. 감정이 해소되니 짜증도 안 내고 잘 자고요. 그런 게 참 감사하지요."(민우(가명) 어머니)
"아이가 '엄마, 오늘 자고 나면 내일 놀이터 가는 날이지. 몇 시에 가?' 그런 말도 해요. 조에 자기 친구도 있다며 들떠서 가요. 흙 밟고 소리 지르며 놀고, 깨끗한 곳에서 선생님들과 안전하게 놀고요."(은호(가명) 어머니)
조민정 부산종합사회복지관 팀장도 "어떤 아이는 아침에 급체했는데, 놀고 싶다고 약 먹고 이바구 놀이터에 왔다"며 "잘 놀고 갔다. 다쳐도 안 아프다고, 괜찮다고, 노는 걸 너무 행복해한다"고 했다.
부모가 해줄 수 없는 한계 역시, 아이들끼리 놀이로 채워가니까. 등산하다 우연히 이바구 놀이터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뭔데 저렇게 재밌게 놀까 싶어 신청했다는 소영이(가명) 어머니는 "아이들끼리 노니까 더 크고, 진짜 많이 성장하는 것 같다. 정말 그렇다"고 했다.
그리 좋아하는 '이바구 놀이터'가, 내년부터 없어질 위기에
컵을 쌓는 단순한 놀이도 즐겁고요./사진=남형도 기자
실은 보건복지부에서 2020년에 '놀이혁신 사업'으로 진행한 거였다. 선정한 지자체 10곳 중 부산 동구 '이바구 놀이터'가 있었다. 그런데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선 예산이 확보된 게 없다며, '지역사회서비스 투자사업(바우처)'으로 진행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 관계자는 "(바우처 안에서) 다른 사업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고, 지자체 의지와 재정 상황이 관건"이라고 했다. 국비(중앙정부 지출 비용)와 지방비(지자체 지출 비용)가 같이 투입되는 사업이어서다.
보건복지부가 지자체에 공을 넘기고 빠지는 모양새가 되자, 지자체 재정 상황과 의지에 따라, '아이들 놀이 사업' 같은 건 언제 없어져도 이상할 게 없게 됐다. 특히 지자체 재정이 열악한 곳도 많아,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쉽다.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놀아' 같은, 놀이의 중요성에 대한 낮은 '인식'도 한몫한다.
거미줄처럼 유연하게 줄을 빠져나가는 놀이도 즐거워요./사진=남형도 기자
엄청 신나서 뛰노는 아이에겐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학부모들에게 말하자 이구동성으로 우려하고, 진정서까지 내겠다고 할 정도로 속상해했다. 가뜩이나 한 달에 한 번이라 아쉬운데, 너무 좋아서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없어지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지금도 동주민센터에 '이바구 놀이터'를 신청하는 날이면 오전 7시부터 줄을 선단다.
한 학부모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아이들이 '뛰지마!' '살살 걸어!'란 말을 안 들었을 거예요. 집에 가면 또 단속해야겠지요. 그래서 더 작정하고 놀았을 테고요. '이바구 놀이터'에 다녀오면 아이가 물어요. '엄마, 이번엔 나 언제 가요?' 없어지면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리고 애들이 앞으로 어디서 뛰놀까 싶어요."
자는 시간도 아쉽다. 놀고 싶으니까./사진=남형도 기자
숲속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계속 놀았다. 마치 그동안 못 놀았던 한을 다 풀겠다는 듯.
중간에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을 쉬게 하려 낮잠 시간을 가졌다. 열정적으로 놀던 선생님들도 휴식이 필요했으므로.
아이들도 이젠 좀 자겠지, 싶었는데 웬걸 다들 실눈을 뜨고 있었다(좀 많이 귀여움).
하도 안 자니까, 남재동 놀이대장님이 "잠을 자는 친구가 많은 조에게 칩을 줄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데도 안 잤다. 아이들은 눈을 깜빡거리고, 몸을 꿈틀거리며, 어서 이 잠자라는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엔 남 놀이대장님도 웃으며 "그만 쉬고 다시 놀까요?"하고 물었다. 누워 있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네에에에엣!"
그 힘찬 함성에, 숲의 푸르름이 더욱 짙어지는듯 했다.
즐거웠어요, 이바구 놀이터. 아이들과 함께./사진=숨은 남형도를 찾길 바라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