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가 옳았다 [김지산의 '군맹무中']

머니투데이 베이징(중국)=김지산 특파원 2022.05.28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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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강화로 중국 영화 국뽕판으로 전락

편집자주 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고는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고사성어입니다. 잘 보이지 않고, 보여도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운 중국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그려보는 코너입니다.

영화 '귀신이 온다' 한 장면/사진=귀신이 온다 캡처영화 '귀신이 온다' 한 장면/사진=귀신이 온다 캡처


1944년 섣달 보름날밤, 일본군 주둔지 허베이성 농촌 시펑커우. 마다산 집에 괴한이 들이닥친다. 마다산 이마에 총을 겨누고 커다란 포댓자루 2개를 맡긴다. 정월이 되면 찾으러 올 테니 잘 보관하라며. 일본군에 신고하거나 자루 속 물건에 해를 끼치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고는 사라진다.

자루 속 주인공은 일본군 병사와 중국 통역관이다. 일본군에 보낼 수도, 중국을 침략한 원수와 매국노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다산과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다. 정월에 온다던 괴한은 감감무소식이다.



마다산과 주민들은 일본군 포로와 합의해 그들을 일본군영에 보내주고 곡식을 받아낸다. 그러나 사소한 오해로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몰살한다. 잠시 뒤 일본 본토가 미국에 항복하자 국민당이 마을로 쳐들어오고 일본군은 포로 신세가 된다. 간신히 살아남아 복수심에 불타는 마다산은 일본군을 죽이고 다니다 사로잡힌다. 국민당 장교는 전쟁포로를 살육한 건 범죄라며 마다산의 목숨을 일본군 포로들에게 맡긴다. 그렇게 마다산은 일본인 칼에 목이 베인다.

중국 연기파 배우 장원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귀신이 온다' 스토리다. 이 걸작은 2000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에서 영화 상영이 금지되고 장원은 7년간 감독 활동 정지 처분 됐다.



보통 제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중국 정부의 행동 패턴은 장원에게 그대로 적용됐다. 세간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마을로 돌아왔다는 점, 일본군이 중국인을 살육하는 발칙한 장면을 실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귀신'의 정체가 공산당을 자극했을 거라는 해석도 있다. 해석은 국민당이나 일본놈이나 마을 주민을 개돼지로 여기기는 마찬가지라는 데서 출발한다. 도대체 누가 적이고 우리 편인지 모를 상황. 어차피 그놈이 그놈, 예고 없이 나타나 멀쩡한 사람을 해코지 하는 귀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해외에서 극찬을 받은 이 영화를 중국인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감상할 수 없다. 세계화 시대를 거스르는 과도한 애국주의 일명 '국뽕' 아니면 시대에 대한 담대한 도전, 고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식 코미디만이 스크린을 점령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중/사진=CJ ENM영화 헤어질 결심 중/사진=CJ ENM
칸느를 빛낸 '헤어질 결심' 탕웨이가 중국 영화판에만 머물렀다면 "내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줬다"(박찬욱 감독을 향한 찬사)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중국 영화계에서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늘날 중국 영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역대 박스오피스 상위 5개 영화를 보자. 1위 장진호(장르 '국뽕', 수입 약 57억위안(약 1조660억원)), 2위 전랑2(국뽕, 약 57억위안), 3위 안녕, 이환영(가족, 코미디, 약 54억위안(약 1조100억원)), 4위 나타지마동강세(애니메이션, 약 50억위안(약 9350억원)), 5위 유랑지구(국뽕, SF, 약 47억위안(약 8800억원)).

국뽕에 가족, 애니메이션, SF 등 다양해 보인다.

한국 순위다(관객기준). 1위 명량(역사, 약 1761만명), 2위 극한직업(코미디, 약 1626만명), 3위 신과 함께-죄와벌(SF, 약 1441만명), 4위 국제시장(역사, 약 1426만명), 5위 베테랑(액션, 약 1341만명).

역사와 코미디, SF, 액션 등이다.

중국은 시대와 표현 수단이 다를 뿐 국뽕이 대세다. 같은 국뽕이라도 한국 영화 명량은 이순신이라는 민족의 영웅 이야기고 중국은 현대와 미래에 걸쳐 있다. 6.25 전쟁,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을 이기고(장진호), 중국 특수 부대원이 아프리카 내전에서 중국인들을 구출하며(전랑2), 더 나아가 중국인들이 지구를 구한다(유랑지구).

영화 장진호가 끝나자 경례하는 중국 관객들/사진=웨이보 영화 장진호가 끝나자 경례하는 중국 관객들/사진=웨이보
장진호를 본 관객들 중 피 끓는 젊은이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동안 곧게 서서 영화에 경례를 하고 전랑2에서 배우 우징은 오성홍기를 팔에 두르고 "중국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외친다.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게도 중국 여권이다. 여권 뒤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네 뒤에 강력한 조국이 있다"(실제 여권에는 없음).

작품성 있는 영화로 눈을 돌리면 중국은 찾기가 힘들다. '귀신이 온다' 같은 뛰어난 영화는 배척당하니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중국 영화가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1905년 중국 최초 영화 '딩쥔산'을 시작으로 120년 가까이 양질의 영화를 많이 만들어왔다.

1993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천카이거 감독의 불후의 명작 '패왕별희'가 대표작이다. 두 남자 경극배우는 태평양 전쟁에서부터 국민당 공산당 패권다툼, 문화대혁명 비극을 온몸으로 겪는다. 역사와 개인사는 어느덧 한 몸이 되고 패왕별희를 연기하는 마지막 공연에서 그들은 패왕(항우)와 우미녀의 운명을 따른다.

또 다른 걸작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은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양조장 수수밭을 배경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가난한 집 딸 공리는 일본군에 의해 핏빛으로 물든 중국 근대사를 실감나게 보여줬다. 2006년과 2007년 잇달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휩쓴 '스틸 라이프', '색, 계'도 빼놓을 수 없는 명작들이다.

영화 패왕별희 포스터/사진=바이두영화 패왕별희 포스터/사진=바이두
천카이거, 장이머우 같은 5세대 감독 시대에 중국 영화는 빛나는 한때를 구가했다. 스틸 라이프의 6세대 자장커 감독 이후 중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는 접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이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뛰어넘는 작가들이 연이어 나오고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는 것과 정반대다.

천카이거, 장이머우 감독이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을 때 그들을 배출한 베이징뎬잉대학(북경전영학원)은 90년대 세계적인 영화 대학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대학을 명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국 영화의 질적 수준이 낮아진 건 영화를 공산당 이데올로기 선전 수단으로 여기는 시각이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어서다. 역사를 곡해하거나 인민해방군, 경찰, 사법권을 폄하해선 안된다. 음란하고 저속한 내용은 물론 과도한 살인 장면, 폭력, 공포도 배격 대상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권력을 잡은 2012년 무렵부터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과 통제가 강화됐다. 부조리한 현실, 정부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작할 수 없다. 국뽕과 코미디를 권하지 않지만 이것들 말고는 설 땅이 없다.

윤영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웹진 '다양성+Asia'에 기고한 한 기고문에서 중국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80년대, 90년대생들이 국뽕과 코미디를 선호하는 것도 중국 영화 소재가 제한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영화 붉은 수수밭 포스터/사진=바이두영화 붉은 수수밭 포스터/사진=바이두
성룡은 공공연하게 중국 공산당 가입을 희망한다며 체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천카이거, 장이머우 감독은 각각 장진호, 저격수 같은 국뽕 영화의 거물이 됐다. 장이머우 감독은 2008년, 2022년 여름과 겨울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을 총지휘했다.

중국 정부는 예술적 완성도 같은 질적 성장보다는 스포츠 경기를 하듯 양적 성장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11월 국가영화국이 발표한 '14차 5개년 중국 영화 발전 계획'을 보면 △매년 수익 기준 1억 위안(약 190억원) 이상 국산 영화 50편 완성 △작품성을 갖추고 흥행도 성공하는 영화 10편 완성 △국산 영화로 연간 박스오피스 점유율 55% 이상 유지 △2025년까지 10만개 스크린 돌파 △국영 하이테크 영화 연구소 설립 △SF 영화 제작 지원과 특수 효과 수준 향상 등이 나열됐다.

5000년 역사, 세계 어느 나라보다 치열했던 근현대사를 보유한 나라, 동아시아 철학의 기틀을 만들고 완성한 나라가 막대한 영화적 자산을 묵혀두고 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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