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직원은 어떻게 에스크로 계좌서 615억원을 싹 긁어갔나

머니투데이 오상헌 기자 2022.04.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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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직원 600억원대 M&A 계약금 횡령
2012년부터 3차례 전액 빼낸 후 2018년에는 계좌 해지
ISD 소송 등 계약금 처리 지연에 '깜깜이 관리' 사각지대
은행 내부통제시스템 도마, 금융당국 "사안 무척 엄중해"

은행 직원은 어떻게 에스크로 계좌서 615억원을 싹 긁어갔나


대형 시중은행에서 은행 직원이 6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횡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해 금융권이 충격에 빠졌다. 인수합병(M&A) 관련 계약금이 보관된 에스크로 계좌를 관리하던 직원이 6년 간 세차례에 걸쳐 원금과 이자를 모두 빼낸 후 계좌를 해지했고, 이후 4년이 흐르는 동안 내부에서 계좌 존재 자체를 전혀 인지하지 못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부 통제 시스템이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28일 금융권과 경찰에 따르면,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차장 A씨는 2012~2018년 사이 옛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관련 계약금을 보관한 에스크로 계좌에서 원금 578억원과 이자 등 약 615억원을 세 차례에 걸쳐 전액 횡령한 혐의(특경가법상 횡령)로 전날 밤 경찰에 긴급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 우리은행도 자체 검사를 진행 중이며, 금융감독원은 이날부터 직원을 파견해 검사에 착수했다.



머니투데이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대형 횡령 사건은 '관리 사각지대'에서 발생했고, 횡령 과정에서 은행 내부 통제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A씨가 빼돌린 자금은 지난 2010년 11월 옛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이란 최대 가전그룹 엔텍합이 채권단에 납부한 계약금(578억원)이다. 우리은행은 대우일렉 매각 당시 채권단 간사은행으로 M&A를 주관했다.

당시 대우일렉 매각은 엔텍합의 인수자금 조달 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채권단과의 가격 이견으로 최종 계약(SPA)을 맺지 못 하고 좌초됐다. 엔텍합이 납부한 계약금은 채권단이 몰취해 우리은행이 별단예금(미결제 ·미정리된 일시적 보관금·예수금 등을 처리하는 일시적 계정) 등 은행 계정과는 다른 에스크로 계좌에 넣어두고 당시 M&A 업무를 담당한 기업개선 관련 부서에서 일하던 A씨가 계속 관리했다고 한다. A씨는 기업개선부에서만 10년 넘게 일했고 전날까지도 정상 출근했다. A씨는 계좌가 만들어진 직후인 지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세 번에 걸쳐 계약금 원금과 이자를 모두 빼낸 뒤 2018년 계좌를 아예 해지해 버렸다고 한다.



당시 사정에 밝은 은행권 관계자는 "채권단이 계약금을 몰취하자 엔텍합이 2015년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중재판정부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계약금과 이자를 합해 756억원을 돌려달라는 투자자·국가간 소송(ISD)를 제기하는 등 계약금 처리가 계속 미뤄졌다"며 "이 과정에서 A씨가 대담하게 순차적으로 돈을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은행업계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도 "통상 M&A 과정에서 몰취한 계약금은 채권단이 지분비율대로 나눠갖지만 이번 경우는 이란 기업이 계약금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다 ISD까지 제기하는 과정에서 관리 사각지대에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대우일렉 매각 당시 근무했던 기업개선 담당 직원들이 거의 퇴사하거나 부서를 이동해 계좌 존재 자체를 아는 직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해당 계좌가 해지된 2018년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계좌여서 내부 통제에 한계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A씨의 횡령 사실이 드러난 건 ISD 패소로 몰취한 계약금을 엔텍합에 반환하기 위해 최근 계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파악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는 엔텍합이 제기한 ISD에서 2019년 패소 판결을 받았으나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송금이 여의치 않아 배상금(계약금) 반환을 미뤄왔다. 이후 지난 1월 미국 정부는 배상금 송금을 특별 허가했다.


업계에선 이번 횡령 사건이 은행 내부 통제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금융감독당국도 횡령 금액이 워낙 큰 데다 상식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안이 엄중하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오늘부터 검사에 착수해 사실관계와 구체적인 경위를 파악할 것"이라며 "은행에서 발생한 대형 횡령 사건이어서 심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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