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왜 이렇게 얇아요?"...러시아 대통령이 물었다

머니투데이 이상배 경제부장 2022.04.05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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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서울=뉴스1) 인수위사진기자단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2022.4.5/뉴스1  (서울=뉴스1) 인수위사진기자단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집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2022.4.5/뉴스1


#1. 1990년 6월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공산당 서기장), 양국의 국가원수가 사상 처음으로 마주앉았다.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극비 추진된 제1차 한소 정상회담이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중요한 회담이었던 만큼 한국 측 배석자들은 서류를 꼼꼼히 준비해갔다. 반면 소련 측 참석자들은 서류 한 장 없이 펜 한 자루씩만 달랑 들고 회의장에 들어왔다.



회담에 동석한 김종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자신을 소개하자 고르바초프가 김 수석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리키며 농담을 던졌다. "이게 왜 이렇게 얇습니까?"

그때 소련은 우리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생각만 가득했다고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은 회고했다.(저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 그 시절 소련과의 외교는 경제협력에 다름 아니었다. 외교에 있어 경제가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압도한 대표적인 사례다.



(세종=뉴스1) 장수영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사진은 세종시 어진동 대통령기록관에 전시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습.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2021.10.26/뉴스1   (세종=뉴스1) 장수영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사진은 세종시 어진동 대통령기록관에 전시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습.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정당(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2021.10.26/뉴스1
#2. 소련의 적통을 이은 러시아가 강대국인 건 비단 핵무기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불구하고 서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러시아의 진정한 힘은 군사력이 아닌 천연가스다.

나토(NATO)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나토 헌장 5조에 따르면 나토 회원국이 하나 이상 공격받으면 반드시 다른 회원국들이 나서야 한다. 여기엔 미국도 포함된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고, 영국과 프랑스도 핵을 쥐고 있는데 서방 입장에서 러시아의 핵무기가 뭐가 그리 무섭겠나. 하지만 가스는 다른 얘기다. 현재 유럽에서 쓰이는 가스의 약 45%가 러시아산이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슬로바키아는 가스를 100%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체코와 불가리아는 80%,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60%, 독일은 50% 정도의 가스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사이가 좋으면 가스를 더 값싸게 들여올 수 있다. 핀란드는 발트해 국가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러시아산 가스를 받고 있다. 외교 관계가 틀어지면 국민들이 부담하는 가스 요금이 올라가니 정부 입장에선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외교와 경제가 얽히면서 빚어진 비참한 현실이다.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마흐무드 알리 칼리마토프 잉구셰티아 자치공화국 수장을 만나고 있다.  (C) AFP=뉴스1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마흐무드 알리 칼리마토프 잉구셰티아 자치공화국 수장을 만나고 있다. (C) AFP=뉴스1
#3.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통상교섭본부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떼어내 외교부에 합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세계적으로 자국이익 우선주의가 발호하고 있으니 경제안보를 위해 통상과 외교를 함께 다루자는 문제의식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나라와 기업, 국민들의 이익이 걸린 통상을 외교부에 맡기는 게 맞는지는 신중하게 따져볼 문제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5년 졸속 추진된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민 개인의 입장보다 협상 타결 등 정치적 성과를 중시하는 외교 조직의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외교관도 많다는 건 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외교가 국내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된 통킹만 사건 역시 미국의 국내 정치논리와 무관치 않았다. 1964년 대선을 앞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미온적이라는 정적들의 비판을 의식해 북베트남을 상대로 강경노선을 택했다.

외교부는 태생적으로 정치적 조직이다. 정치적 판단보다 경제 논리를 우선하는 산업부와 같은 전문가 집단과는 다르다. 무역협상 타결이란 정치적 성취와 국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협상 결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두 조직의 차이는 명확해진다.

통상을 지렛대로 쓰면 외교에 도움이 된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통상이 외교의 수단이 되면 통상의 당사자인 기업들은 뭐가 되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기업에게 이익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게 파시즘(전체주의)이다. 윤석열 당선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공정'이란 시대정신과도 정반대로 가는 길이다.

"이게 왜 이렇게 얇아요?"...러시아 대통령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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