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후]두 명의 '블라미디르' 운명의 대결...최후의 승자는

머니투데이 김성휘 기자 2022.03.26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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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와 이슈 속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뉴스와 이슈를 짚어봅니다.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뉴스1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뉴스1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름은 블라디미르(Vladimir).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볼로디미르(Volodimir)다. 블라미디르는 어릴 적 애칭 '볼로쟈'라고 부르는, 슬라브어의 대표적 남자 이름이다. 옛 소련 지도자 레닌의 이름도 블라미디르였다. 이게 우크라이나어에서는 볼로미디르로 변용될 뿐 같은 이름이다.

벌써 한 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명의 블라디미르가 벌이는 전쟁이다. 사실상 같은 이름을 쓰지만 둘이 걸어온 길은 비교하기 어려울만큼 너무 다르다. 푸틴 입장에선 젤렌스키같은 인물이 자신의 '숙적', '라이벌'이 된 게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북쪽의 '블라디미르'는 뼛속까지 소련인이다. 소련해체를 아쉬워하고, 자신의 재임중에 위대한 소련의 복원을 꿈꿔 온 인물이다. 반면 남쪽의 '볼로미디르'는 코미디언 배우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화에 박차를 가했다.

2007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푸틴/사진=TIME2007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푸틴/사진=TIME


제왕적 대통령이 궁금해? 이 남자 보라
소련은, 난데없이 나타난 비정상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하나의 국가 그 자체다. 적어도 푸틴에겐 그렇다. 서방이나 민주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낡은 이념 탓에 실패한 실험체, 이질적인 민족과 국가를 덕지덕지 붙여 언젠가는 찢어질 수밖에 없던 조각보 정도로 여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소련의 해체와 공산권 붕괴는 푸틴에겐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다시 그와 같은 일이 생겨서도 안된다. 러시아의 최고권력자로서 자신의 사명 또한 '위대한 소련의 부활'이라고 여기기에 충분한 맥락이다.

푸틴은 1952년, 소련시절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레닌, 스탈린의 교외별장(다차)에서 일했던 요리사였고 아버지는 소련군으로 복무하다 팔을 다친 상이군인이었다. 2차 대전의 폐허 속에 푸틴 가족은 가난했다. 초등학생 '블라미디르'는 불량기가 다분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고학년이 되면서 점차 달라진 그는 운동(유도)와 공산당 활동에 매진하며 첩보원의 꿈을 꾸게 된다.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법학부에 진학하면 유리할 거란 조언에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고 1974년 KGB 수습요원에 발탁된다. 그의 KGB 시절은 지금도 베일에 싸여있다. 마치 영화에서 보듯 유능한 공작요원이었다는 설부터 평범한 직원에 가까웠다는 주장까지 섞여있다. 푸틴은 소련 붕괴 당시 동독 드레스덴 KGB지부에 근무했는데 동독 슈타지 신분증을 갖고있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20만명이 모인 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은 정당하다”고 연설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모스크바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20만명이 모인 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은 정당하다”고 연설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직장잃은 KGB요원→택시기사→대통령까지
소련이 무너지자 귀국한 그는 갈팡질팡했다. 경제가 파탄난 당시에 많은 이들이 그랬듯 무허가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푸틴 스스로 국영방송 다큐멘터리에서 공개한 사실이다.

그는 '1991년 소련 붕괴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였느냐'고 묻자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비극이었듯 나에게도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달빛을 보며 택시를 몬 적도 있다"며 "가끔 돈을 더 벌어야 했고, 그래서 개인 자동차로 택시 운전을 했다. 솔직히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쾌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소련부활자' 푸틴의 생각을 더 또렷이 보여주는 대답이 또 있다. 그는 "소련의 붕괴는 곧 역사적인 러시아의 종말이었다"며 "국가는 40%의 영토를 잃었고, 비슷한 규모의 산업생산력과 국민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특히 "소련 붕괴와 함께 250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하루 아침에 국경 너머, 독립한 옛 소련 공화국들에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비록 수십년 전과 똑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옛 소련 구성국들을 경제공동체 또는 느슨한 연맹으로 묶는 것이 푸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내는 발언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독립을 주장해 온 도네츠크, 루한스크(루간스크) 공화국이 바로 '국경 바깥에 남은 러시아계 주민'을 중심으로 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로선 일종의 쿠데타 세력이지만 푸틴은 독립을 승인했다. 또 이들의 안전보장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에 탱크를 진격시켰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부패한 정치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KBS '세계는 지금' 캡처젤렌스키 대통령이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부패한 정치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KBS '세계는 지금' 캡처
젤렌스키, 푸틴 짜증나게 하다
젤렌스키는 푸틴에 비하면 정치력, 외교력 어느 것 하나 검증된 것 없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기존 정치권에 신물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정치인도, 기득권자도 아닌 그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보낸 덕이다.

올해 44세 유태인 혈통의 젤렌스키는 대학에서 법학과를 다니고 1990년대 코미디언과 배우로 활약했다. 우크라이나 더빙판 '패딩턴2'에 성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2015년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이라는 드라마다. 그는우크라이나 정치권의 부패가 심각해지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고등학교 역사교사 역할을 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이 드라마 제작사는 젤렌스키와 함께 드라마 제목과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했다. 동영상을 통해 대선출마를 선언한 젤렌스키는 2019년 73% 이상의 득표율로 페트로 포로셴코 현직 대통령을 침몰시키고 당선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구 소련에 대항해 싸웠다고 한다. 또다른 가족 중 일부는 독일 나치의 점령 기간 동안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에 의해 살해됐다.

2019년 4월, 젤렌스키가 압도적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될 때 개표 중계 모습. 러시아와 전쟁중인 2022년 4월은 그의 당선 3주년이 된다./KBS '세계는 지금' 캡처2019년 4월, 젤렌스키가 압도적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될 때 개표 중계 모습. 러시아와 전쟁중인 2022년 4월은 그의 당선 3주년이 된다./KBS '세계는 지금' 캡처
도피차량 대신 SNS 선택한 '현대판 처칠'
외부에선 그를 불안한 눈으로 봤다. 실제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서방에서도 젤렌스키의 무모한 나토가입 시도 등이 가뜩이나 나토의 동진에 짜증이 난 러시아를 결정적으로 자극했다는 시선이 적잖다. 그럼에도 젤렌스키는 보란듯이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주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에 비견되는 전쟁지도자로 떠올랐다.

절대화력에선 러시아에서 밀리는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게다가 각국 의회에서 화상연설이란 전례없는 여론전으로 우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명품옷을 입은 푸틴이 전통적인 강대국 외교의 틀에서 군사 무력적인 결단으로 상황 변화를 모색했다면 젤렌스키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과 티셔츠 차림의 모습으로 전황을 뒤흔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달이나 끌면서 교착상태로 접어드리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예상밖 상황을 이끈 게 '무명의 전사' 젤렌스키다. 미 USA투데이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현대판 윈스턴 처칠'(Modern day Winston Churchill)이라고 묘사했다.

미국 의회에서 동영상 연설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CNN 중계 화면미국 의회에서 동영상 연설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CNN 중계 화면
"형제"라면서 침공, 우크라 민족주의 자극
국가로서 러시아의 출발점은 '키예프 루시'(키이우 루시) 공국으로 본다.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다. '루시'(루스)는 민족 이름이자 오늘날 '러시아'의 어원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에 산다.

9세기에 태동한 키예프 공국은 찬란했다. 문화적 경제적 자존심도 셌다. 프랑스 왕가로 시집 갔던 키예프(키이우)의 한 공주는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는 야만적"이라고 말했다.

건국 후 약 300년이 지난 13세기, 몽골이 발칸반도까지 파죽지세로 확장하자 키예프 공국은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그 전부터 다양한 공국들로 찢어지며 분열했던 나라는 다시 힘을 합치지 못한 채 문을 닫는다.
우크라이나 국기(왼쪽)와 국가문장/사진=wikipedia 우크라이나 국기(왼쪽)와 국가문장/사진=wikipedia
키예프공국의 최북단, 척박한 땅에 작은 제후국이 있었다. 여러 제후국 중에서도 후발주자이자 약체였다. 하지만 이후 세력을 급속히 키우더니 잔존한 루스 세력을 통합, 대공국으로 발전한다. 모스크바다. 이것이 현대 러시아의 기초가 된다.

대슬라브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키이우)는 형제인 셈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그 형제를 무력으로 침공, 그 땅에 강력한 반러 감정을 일으켰다. 러시아와 자신을 뚜렷이 구분하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런 극적인 분화는 블라디미르와 볼로미디르라는, 사실상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지도자의 운명에 투영된다. 두 대통령이 지금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 됐다. 마치 각자 이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갈라진 것처럼. 역사는 두 명의 블라디미르(혹은 볼로미디르) 가운데 승자와 패자를 나눌 것이다. 이 전쟁으로, 키예프 루시(키이우 루시)의 진정한 후계자가 결정될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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